"트럼프는 지미 카터가 아니다"[최종일의 월드 뷰]

이란 인질 사태(1979년 11월 4일~1981년 1월 20일) 당시의 모습이다. ⓒ AFP=뉴스1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미국인 52명이 이란 테헤란에 있는 미 대사관에서 1979년 11월 4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444일간 인질로 붙잡혔던 사건은 미국에 국가적 굴욕감과 좌절감을 안겼다. 이슬람 혁명의 열기를 타고 대사관을 장악한 대학생들에 의해 두 눈이 가려진 채 야유를 보내는 군중들 앞에 선 외교관들과 직원들의 비참한 모습은 매일 밤 미국 TV에서 방송됐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아픈 기억이 여전히 선명할 때였다.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원유 수입 금지, 이란 자산 동결로 압박했지만 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오지 못했다. 학생들은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송환을 요구하며 대사관에 난입, 인질극을 벌였다. 미국에 의지해 정치적 탄압을 했던, 팔라비 왕조(1925~1979)의 마지막 샤(이란의 국왕)는 군중들에게 타도의 대상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카터는 1980년 4월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미군 특수부대 델타포스를 투입해 인질을 구출하는 '이글 클로'(Eagle Claw·독수리 발톱) 작전을 지시했다. 하지만 헬기 고장과 모래 폭풍으로 난항을 겪던 작전은 헬기와 수송기가 충돌해 대원 8명이 사망하면서 중단됐다. 세계 최강국 미국으로선 굴욕의 연속이었다. 불에 탄 헬기 잔해는 "거대 사탄(미국)"에 맞서 신이 개입했음을 보이는 증거라고 이란은 선전했다.

인질 사건은 카터가 재선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2001년 9·11 이전에 이란과 이슬람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반면, 당시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인질 사태를 1953년 미국이 기획한 쿠데타에 대한 보복으로 규정하며 반미 감정을 자극했다.

2차 대전 이후 저개발국에서 확산된 민족주의(내셔널리즘) 열기를 배경으로 1951년 의회에서 총리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크가 이란 원유 국유화를 추진하자 영국은 이란산 석유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며 이란을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이란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갔다.

이란이 움직이지 않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영국 비밀정보국(MI6)과 쿠데타를 기획, 진행했다. 일명 아작스(Ajax) 작전. 미 정부에 매수된 시위대로 인해 이란 사회는 급속하게 위기로 빠져들었다. 혼란 속에서 파즈롤라 자헤디 장군은 군을 동원해 질서를 되찾았다.

2013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CIA가 돈으로 매수한 폭도 상당수가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중 시민 200~300명이 사망했다. 쿠데타 이후 자헤디 장군은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에 의해 정부를 꾸렸다. 모사데크 총리는 반란죄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여생을 가택 연금당했다.

모하메드 모사데크 이란의 전 총리 <자료사진> ⓒ AFP=News1

미국이 기획한 쿠데타는 현대 중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됐다. 이후 이어진 친미 팔라비 왕의 서구화 강요, 석유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 정부 부패, 전제적 통치, 비밀경찰을 동원한 반대파 탄압에 누적된 분노는 1979년 혁명의 불씨가 됐다. 그러면서 이란 국민들 사이에선 반서방, 반미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란 민항기 격추와 솔레이마니 암살…이란은 핵개발 박차

미국과 이란의 적대감은 점차 첨예한 대립과 충돌로 나아갔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에서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했다.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알았지만 눈 감았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 막바지였던 1988년 7월 3일 호르무즈 해협 상공에서 이란 국적의 민항기가 미국 해군 함정의 요격으로 승객과 승무원 290명이 사망한 것도 반미 감정을 키웠다. 미국은 미 해군이 민간 여객기를 이란군 F-14 전투기로 오인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란은 민항기임을 알고도 미군이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이란이 비밀리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이란과 서방 간 긴장은 또다시 크게 고조됐다. 하지만 수년간 비밀 협상 끝에 이란은 2015년 7월 14일, P5+1(유엔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과 핵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 합의서인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의 주요 내용은 '이란의 핵 개발을 제한하고 국제사회의 검증을 받는 대가로 경제 제재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이란은 1979년 이후 처음으로 '중동 데탕트'를 맞이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때인 2018년 5월 JCPOA가 이란의 핵 개발을 충분히 막지 못하고,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가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트럼프 지시로 미군이 2020년 1월3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이란의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정예 쿠드스군을 이끌던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암살하면서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사일 공동개발하기도 했던 이스라엘과 이란, 이젠 주적

이스라엘과 이란도 처음부터 적대적 관계로 시작하진 않았다. 이슬람권에서 이란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두 번째 국가였다. 팔라비 왕조에서 양국은 석유를 매매했고, 심지어 '프로젝트 플라워(Project Flower)'라는 탄도미사일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양국 모두 이라크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친미 국가였다.

하지만 혁명 이후 우호 관계는 마침표를 찍었다.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이라고 부르며 외교관계를 끊었다. 테헤란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은 팔레스타인에 넘겼다. 다만,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비밀리에 판매하며 비공식 협력을 지속했다.

19일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라마트 간에서 차량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다. 2025.6.19 ⓒ 로이터=뉴스1 ⓒ News1 강민경 기자

2003년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이스라엘과 이란엔 공동의 적이 사라졌다. 또한 2005년 대통령에 오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우라늄 농축 활동을 재개해 핵개발을 놓고 서방과 긴장을 유지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개발을 '실존적 위협'으로 봤다. 아마디네자드는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표출하며 '그림자 전쟁'을 벌였다. 이란은 대리 세력을 내세워 이스라엘과 전쟁하거나 테러를 저질렀다. 이스라엘은 친이란 무장세력을 공격하거나 이란의 핵 개발 시설을 겨냥한 암살과 해킹 작전 등을 벌였다. 그러다 2024년 이스라엘과 이란은 처음으로 양국 본토를 공격하며 정면 충돌했다.

이스라엘은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무장정파 하마스로부터 기습 공격을 당했다. 하마스는 1200명을 살해한 뒤 251명을 가자지구로 끌고 갔다. 국가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지휘 체계를 괴멸시킨 뒤 여세를 몰아 이란 본토를 직접 공격했다.

보복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2일(이란 현지시간) '하늘의 유령' B-2 스텔스 전폭기와 초대형 폭탄 벙커버스터를 동원해 이란 핵시설 3곳을 타격하며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에 직접 개입했다. 미국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탄생 이후 이란 본토를 처음 공격했다. 확전과 군사 작전 효과의 불확실성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주저했던 결정이다.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휴전도 강제했다.

미 정부 당국자는 미국의 군사 작전을 설명하며 "트럼프는 지미 카터가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 미국 매체는 보도했다. 미국이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의지와 이란에 앙갚음을 한다는 의미가 동시에 담겼다. 미국의 이란 정권교체(레짐체인지) 기획은 반미 신정 독제 체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무력개입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또 이것이 어떤 파장을 낳을지 파악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보복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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