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다시 태어나는 쿠바
[NYT터닝포인트]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직을 사임하다
- 한상희 기자
(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이건 네 거였어" 어머니가 알려줬다. 파란색 여학생 교복을 내게 내밀었다.
현재 82세인 어머니는 1960년대 쿠바에서 떠날 때 가져온 물건들을 종종 꺼내 보이며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한다.
교복 앞쪽에는 별 하나가 꿰매져 있었다. 소매 단은 내가 자라면서 늘려 입을 수 있도록 두껍게 만들어져 있었다.
"기억 안 나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네 살 때 입던 옷이야. 너는 아바나에 있는 유태인 사립학교를 다녔단다. 나도 그 학교를 다녔지. 스페인어와 이디시어(유대인이 쓰는 언어)로 수업을 받았어. 굉장하지 않니? 그때 카스트로가 등장했단다"
나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혁명에서 부모가 잃어버린 것들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성장했다. 수많은 쿠바인 망명자들의 자녀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그려 보인 사회개혁을 믿었다. 여성과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의 동등한 권리, 무료 탁아소, 농민들을 위한 토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주택 공급, 모두를 위한 보건 시스템, 모든 아동을 위한 교육 등을 말이다. 하지만 카스트로가 권위주의와 공산주의로 전향하자 그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아직 트라우마를 벗지 못한 여타 망명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 역시 쿠바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부모 세대는 사라진 쿠바에 대한 기억을 붙들어 두고 싶어 했다. 나는 지난 30년간 쿠바의 변화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내 자신의 기억을 되돌아보고 있다.
쿠바에 남은 아이들도 있다. 이들은 자원 봉사와 공동 희생을 통해 공정한 사회를 구축하려 했던 혁명가들의 손에 자라난 아이들이다. 이들은 심각한 결핍의 시기를 겪으며 고생했으며 지금은 쿠바의 국민 복지 제도의 쇠퇴에 직면한 상태다. 에어비앤비 사업으로 부모님을 부양하고 있는 한 친구는 만약 부모가 쿠바를 떠났다면 자신이 어떤 사림이 됐을지, 또한 무엇을 얻었을지 궁금해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너를 데려간 건 행운이야"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하지만 쿠바 혁명 60주년에 즈음한 지금 쿠바의 새로운 세대, 즉 혁명가들의 손주 세대는 이제 국내외 모두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있다.
오늘날 쿠바의 청년들은 국익을 위해 사탕수수를 베어내던 연장자들이라면 '이데올로기 편향자'로 규정하지 않았을 개인주의자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 제국주의에 대한 공포와 계속되는 무역금지령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건 오직 사랑뿐' 혹은 '맘껏 즐기며 살자'는 문신을 새긴다.
쿠바의 청년들은 브랜드를 사랑한다. 지난 2016년 5월 샤넬은 패션쇼를 위해 아바나를 방문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손자이자 토니 카스트로(안토니오 카스트로 울로아)가 '빠세오 델 쁘라도'(프라도 거리: 아바나 최대의 번화가-역주)에 등장했을 때 세대 간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19세의 모델 유망주로 자기 할아버지를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자수성가한 새로운 세대의 셀러브리티는 이다니아 델 리오(37)다. 해외에서 근무하던 그녀가 아바나로 돌아온 건 카스트로가 사기업을 합법화했을 때였다. 그녀가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인 상점 '클란데스티나'의 대표 상품은 실크스크린 티셔츠다. 지난 2016년 3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문 당시 오바마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이 티셔츠는 현재 아마존에서도 팔리고 있다.
꽤 많은 청년들이 쿠바의 평균 월급에 가까운 28달러를 클란데스티나 티셔츠에 쓸 수 있다는 건 놀랍지만, 그들의 야망은 딱 거기까지다. 쿠바의 청년들은 주로 개인 식당에서 서빙을 하거나 관광객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고, 오래된 쉐보레 차량을 개조한 택시를 모는 일을 한다. 그들의 바람은 쿠바가 '평범한' 나라가 되는 것. 그러나 쿠바에서 이뤄지는 거의 모든 거래는 현금으로 처리된다. 아무도 신용카드를 갖고 있지 않고 돈은 침대 밑에 보관된다.
빠르지는 않지만 쿠바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다시 자본주의 세계를 개방한 쿠바는 불평등도 늘었다. 1990년대 초 쿠바에 다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관광객 대상 상점들은 어두운 커튼 뒤에 숨겨져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처음부터 바라지 못하도록 정부가 쿠바 시민들의 눈을 가려 버린 것. 이제 세상은 변했고 모든 상품은 유리 진열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샤넬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이민이 쿠바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하지만 이제 전 세계 국가들은 국경을 빠르게 닫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미국은 더 이상 시민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
쿠바의 청년들은 이제 이민이 아닌 여행을 꿈꾼다.
내 어린 시절 보모의 손자의 꿈은 아버지의 고향인 관타나모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달에 12달러를 버는 그에게 버스비는 사치다.
그의 처남이 대화 중간에 끼어들어 말했다. "내 꿈은 전 세계를 여행하는 거에요. 그러고 쿠바로 다시 들어오는 거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를 갈망하고 있지는 않았다. "쿠바는 갱단이나 총이 없어요. 안전한 나라죠"
이 두 명의 젊은 아프리카계 쿠바인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은 안정감을 짓누르고 있다. 쿠바에서 인종차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인종에 따른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사기업 수가 늘면서 백인 쿠바인들에게 이익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혁명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쿠바의 아프리카 유산에 강한 국가적 자부심을 심어줬다는 사실이다. 이는 흑인 쿠바인들이 더 큰 평등과 자기표현에 대한 권리를 촉구할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 벌어졌던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포스트-카스트로' 시대로 진입한 쿠바는 불확실한 문턱에 있다. 동성 결혼 합법화를 포함해 진보적인 헌법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한편, 기본적인 인구 문제가 쿠바를 괴롭히고 있다.
쿠바의 출산율은 사상 최저 수준이다. 중남미 모든 국가들 가운데 평균 연령도 가장 높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론은 같다. "나는 절대 피델 카스트로의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여성이 있었고, 경제적 환경을 이유로 드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쿠바의 주택 부족은 심각한 상황이다. 아이를 낳을 공간도 돈도 없는 그들은 당연히 아이를 낳지 못한다.
1950년대 아바나를 떠나기 전 나의 이웃들은 여전히 침실 두 개짜리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들의 손녀는 90살 된 조부모와 동일한 공간에서 37년 동안 똑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부모님 역시 나머지 방 한 칸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녀는 이제 벌써 37살이다. 10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 역시 그의 조부모님 아파트에서 평생을 살았다.
"우리는 살 곳이 없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어요. 아마 아이도 갖지 못할 것 같아요. 전 늙어가고 있어요. 어쨌든 분명한 건 우리는 아이를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거죠"
나는 그녀가 젊은 개척자의 빨간 스카프를 메고 교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엄마가 지어준 내 교복을 회상하며, 쿠바에서 방해받은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잠시 빠져들었다.
그녀 할머니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할머니는 수년 전 선풍기를 사기 위해 결혼반지를 팔았지만 후회 없이 살고 있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란다. 아뀌 비비모스 데 라 에스페란자"
'여기서 우리는 희망으로 산다'는 의미다.
나는 그 할머니의 손녀가 더 이상 유토피아의 꿈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쿠바의 다른 신세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현재를 충실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할머니"
루스 베하르 미시간대 인류학과 교수. 쿠바계 이민자로서의 경험을 담은 청소년 소설 '행운의 소녀의 좌충우돌 성장기'와 시집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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