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휴머노이드 로봇과 함께 사는 노인

정은지 베이징 특파원. ⓒ 뉴스1 박지혜 기자
정은지 베이징 특파원. ⓒ 뉴스1 박지혜 기자

(베이징=뉴스1) 정은지 특파원 = 매년 춘제(春節·중국의 설) 전날 중국 관영방송인 CCTV는 갈라쇼 형태의 '춘완'(春晩)을 방영한다. 연휴를 맞아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함께 춘완을 관람하는 것은 중국에서 자리 잡은 춘제의 흔한 모습 중 하나다.

40여년간 이어져 온 춘완은 최근 들어 과학기술 혁신을 부각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춘완에 광고를 하기 위해서 기업들은 거액의 찬조금을 내는데, 기술 기업의 등장이 증가한 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기술 기업의 비중이 높아졌음을 반영한다.

올해 춘완 역시 지난해 전통춤을 추며 '로봇굴기'를 과시한 유니트리를 포함해 총 4곳의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가장 흥미로웠던 무대는 공중제비, 취권 등과 같은 고난도 동작을 하는 로봇이 등장한 무대가 아닌 일종의 상황극인 샤오핀(小品)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奶奶的最爱)이었다.

16일 중국 CCTV에서 방영된 춘완 중 상황극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일부.

11분 남짓으로 구성된 상황극의 주인공은 할머니와 손자다. 손자는 명절을 맞아 할머니 집에 방문한다. 할머니 집과 약 30분 거리에 사는 그는 200일 넘게 할머니 집을 찾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서운함을 표현하며 차가운 태도로 손자를 맞이한다.

머쓱한 손자는 할머니에게 포옹하려 하지만 할머니는 이를 거부하며 함께 사는 4명의 로봇 손자를 소개하고 이들이 빨래와 같은 집안일도 거뜬히 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로봇 손자의 등장에 이내 서운함을 느낀 손자는 "로봇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다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지만 공중제비를 도는 로봇 손자의 모습을 보고 꼬리를 내린다.

이후 손자는 로봇과는 농담 섞인 대화를 할 수 없지 않느냐며 할머니와의 상호 작용을 강조하지만 로봇 손자는 12간지를 활용한 넌센스 퀴즈도 거뜬히 해내며 할머니를 웃음 짓게 한다.

뿔이 난 손자가 거실에서 뛰는 로봇 손자에게 '뛰지 말라'고 엄포를 놓자 할머니는 울음소리를 내는 로봇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랜다. 토라진 손자가 "집에 가겠다"고 해도 할머니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로봇에게 판정패 한 손자가 서운해하는 사이 할머니는 충전하러 갈 때가 됐다며 퇴장한다.

손자는 남겨진 4명의 로봇 손자에게 "할머니는 하얀색과 빨간색을 좋아하니, 빨래 할 때 섞어서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지금 할머니의 많은 옷이 분홍색인 이유는 내가 빨래했기 때문"이라는 씁쓸한 유머도 건넨다.

이 때 할머니는 충전한다고 들어갔던 방이 아닌 현관문에서 등장한다. 방금 손자에게 차가웠던 할머니는 온데간데없고 따뜻한 태도의 할머니를 본 손자는 경악한다. 방금까지 본인과 대화한 할머니가 알고보니 로봇이었던 것이다.

손자는 "로봇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데 방금 그 로봇은 나에게 인신공격을 했다"며 할머니에게 응석을 부린다.

이어 할머니는 손자를 기다리면서 직접 짠 빨간 목도리를 건넨다. 손자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시간을 보여주듯 목에 여러 번 감고도 남을 정도로 길게 짠 목도리였다.

극 말미에 할머니는 "그래도 로봇은 우리 큰 손주를 영원히 대신할 수 없다"는 말로 손자와 정을 나눈다.

수억 명이 실시간으로 시청한 춘완에서 할머니가 돌봄 로봇과 함께 등장한 무대를 꾸민 것은 중국이 단순하게 기술을 과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로봇과의 정서 교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이미 일부 산업 현장에 로봇이 투입된 것처럼 멀지않아 가족을 대신할 돌봄 로봇이 보편화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이라는 작품은 중국 내 고령화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로봇이 어떻게 사회와 조화롭게 통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지난해 11월의 한중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1월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 이후 한중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기대를 컸던 탓인지 실제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다보니 보이는 성과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너무 조급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은 춘완 무대를 통해 사람과 함께하는 로봇의 모습을 보여줬다. 한중 정상이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 실버경제 분야에서 협력에 공감대를 형성한 만큼 고령화 문제를 로봇과 같은 첨단 기술로 대응하는 분야에서 작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jju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