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日선거…투표지에 후보 이름 쓰는 이유[최종일의 월드 뷰]

日 고베시는 2021년 10월 시장 선거에서 '기호식 투표'를 도입한 바 있다. 위는 '자서식', 아래는 '기호식' 투표용지다. 출처: 고베시
日 고베시는 2021년 10월 시장 선거에서 '기호식 투표'를 도입한 바 있다. 위는 '자서식', 아래는 '기호식' 투표용지다. 출처: 고베시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일본의 산업이나 문화가 세계 표준과 동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고립돼 발전하는 현상을 '갈라파고스화'라고 한다. 갈라파고스 제도가 남미 연안에서 약 1000km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한 데서 비롯됐다.

일본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금자동정산기가 전형적인 사례다. 점원이 바코드만 찍고, 돈은 손님이 직접 현금 투입구에 넣으면 이 기계는 동전을 분류하고 잔돈을 내어준다. 세계적으로 카드 결제가 늘고 있는데도, 일본에선 현금 사용 비중이 높다 보니 기술도 이 방향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투표 방식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국회의원을 뽑는 중의원과 참의원 선거에서 '자서식'(自書式)을 여전히 채택하고 있다. 투표지 빈칸에 정당이나 후보자의 이름을 손으로 직접 쓰는 식이다. 그것도 연필로. 자서식을 채택한 선진국은 사실상 일본이 유일하다. 지방 선거에선 후보자나 정당 이름에 마킹하는 '기호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이를 도입한 지자체는 많지 않다.

이로 인한 문제는 적지 않다. 우선, 무효표가 많다. 지역구 선거 기준으로 일본의 무효표 비중은 한국과 비교해 3배 수준이다. 문자로 이름을 쓰기 어려운 유권자도 있다. 일본은 점자 투표나 투표소 직원에 의한 대리 투표를 허용하지만, 누구에게 표를 주는지 타인에게 노출되는 구조에 거부감을 느끼는 유권자도 존재한다.

자서식에 발맞춰 관련 기술도 기묘하게 발전했다. 최근 일본의 한 방송사는 오는 8일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의 투표용지엔 "놀라운 기술이 숨겨져 있다"고 보도했다. 플라스틱 필름을 주원료로 하는 합성지가 투표용지로 사용되는데, 종이에 가까운 질감이어서 연필로 쓸 수 있고, 접어도 금방 펼쳐진다는 것이다. 볼펜은 잉크가 번질 수 있단 이유로 금지된다. 연필로 쓰면 지워질 수 있음에도 말이다.

안분표(按分票)라는 독특한 투표 계산 방식도 있다. 후보자 A가 김길동이고, 후보가 B가 이길동인데 유권자가 '길동'이라고 기재하는 경우다. 일본은 이 표를 유효한 것으로 보고, A와 B 두 후보의 득표 비율에 맞춰 나눠 준다. 2021년 중의원 선거 때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이 모두 자신들의 약칭을 민주당으로 등록했는데, 투표지에 "민주당"이라고 쓴 유권자가 약 200만 명에 달했다.

일반 종이에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특수 가공만 하면 되는 것인데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왜 자서식을 고집할까.

정치학자인 고마츠 히로 리쓰메이카대 교수는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자서식이 유지되는 배경과 관련해 기호식이면 후보자 순서가 당선에 영향을 준다는 우려와 정치인들이 유권자가 직접 이름을 써야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이유에 가깝다.

중의원은 1994년 기호식을 채택했던 전례가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단 한 번도 시행되지 못한 채, 이듬해에 없던 일이 됐다. 유권자가 투표용지에서 후보자나 정당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고, 후보 등록 마감 후에 후보자나 정당의 이름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새로 제작해야 한다는 점이 이유였다. 제도의 비효율이 아니라, 변화 자체를 꺼린 결과로 보인다.

핵심은 자서식이 현직 의원과 기존 정당에 구조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오래된 전통이라기보다, 기득권층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정치적 도구에 가깝다. 그리고 이를 문제 삼지 않는 일본 사회 전반의 보수적 분위기가 이 제도를 지금까지 떠받쳐 왔다. 플라스틱 투표용지는 일본 사회의 '박제된 미래'가 아닐까.

allday3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