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70주년 아시아의 가희(歌姬) 등려군의 생애와 양안 관계

외성인 출신 부모 사이에서 출생…군 위문공연·선전방송 나서기도
중국 민주화 지지…결국 본토서 콘서트 열지 못해

대만의 가수 등려군.(등려군문교기금회 갈무리)

(서울=뉴스1) 김민수 기자 = "오래전 돌아가신 가수분 아닌가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좋아하는 가수인데, 저는 자세히는 잘 몰라요"

지난 12일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22세 여성은 덩리쥔(등려군, 테레사 덩)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만 진리대학교에서 만난 학생들도 대부분 "우리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가수였다"거나 "오래 전 돌아가신 분 아니냐"고 했지만 등려군이라는 가수의 존재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타이베이의 한 식당을 운영하는 50대 첸씨는 "대만에서 등려군을 모를 순 없다. 다만 오래전 가수다 보니 젊은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고 답했다.

대만인에게 등려군이라는 가수는 나이에 따라 느끼는 친숙함은 다를지 몰라도, 국민가수로서의 존재감은 대만에서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자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이 짓밟혔다면서 대만 봉쇄 군사 훈련을 실시해 대만해협을 둘러싸고 긴장은 크게 고조다. 최근에도 대만의 최전선 진먼다오에서 중국 군용 무인기가 포착되면서 대만군이 이에 대응 사격을 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대만해협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화약고로 부상한 상황에서 가수 등려군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등려군과 길지 않았던 그의 삶에는 중국과 대만 양안 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외성인 출신 부모에게서 출생…시진핑도 즐겨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등려군은 1953년 1월29일 대만 윈린 현 바오중향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부모는 외성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중국 본토 허베이성, 어머니는 본토 산둥성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국민 혁명군 군인이었으며, 국공내전 이후 대만으로 넘어왔다.

대만의 인구는 약 98%가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한족이며, 나머지 약 2%는 소수민족인 원주민이다. 한족 인구는 17세기에 건너온 '본성인'과 1949년 중국 공산당에 패해 넘어온 국민당 장제스 지지층인 '외성인'으로 나뉜다. 이 같은 배경으로 등려군은 향후 중국 본토의 부모님의 고향에서 콘서트를 갖는 것을 꿈꾸게 됐다.

중국 본토와 가까운 대만 진먼다오 마산관측소에 유명 가수 등려군이 생전 선전방송 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연한 모습. 2020.10.30/뉴스1 ⓒ AFP=뉴스1 ⓒ News1 김민수 기자

등려군은 1967년 첫 앨범을 내고, 대만의 인기 드라마 '징징'의 주제가를 부르게 되면서 주목받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첨밀밀'이나 '월량대표아적심' '야래향' 등이 대표곡이다. 야래향은 만주로 이주한 일본인 가정에서 1920년 태어나 만주국을 찬양하고 군군주의를 미화했던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이 1944년 처음 불렀던 곡이다.

등려군은 그 시절 아시아 각국에서 유명한 가수라면 진출을 꿈꿨던 일본에서 성공해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당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일본어로 부르기도 했다. 51년 간의 일제 식민 통치를 겪었지만 대만에선 일본에 반감보다는 대한 호감이 크다. 일제 통치 시기에 국가 정체성이 약했고, 일제가 물러간 뒤 국민당 정부의 폭압적 통치가 오랫 동안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는 홍콩과 마카오 등 중화권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의 노래는 중국 본토를 흔들었다. 1949년 국공내전 이후 대만과 중국의 교류는 엄격히 제한됐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망 이후 1979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개혁·개방 정책으로 등려군이 노래들이 중국 본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은 등려군의 노래를 '정신오염'이라는 이유로 양안관계가 해빙됐던 1987년까지 제한했다. 대만출신이 문제가 됐는지 리샹란의 노래를 불러서 그랬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시 "낮에는 늙은 덩(덩샤오핑)을 듣고, 밤에는 젊은 덩(덩리쥔의 노래)을 듣는다(白天聽老鄧, 上聽小鄧)"는 말이 돌 만큼 중국인들은 등려군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우연히도 등려군과 같은 1953년생인 시진핑 현 중국 국가주석도 젊은 시절 자신이 등려군의 노래를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즐겨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91년 대만 진먼다오 마산관측소에서 선전방송하는 가수 등려군.(유튜브 갈무리)

◇대만 군인의 '친한 친구'…최전선 진먼다오서 선전방송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위상이 위축된 것과 맞물려 등려군의 가수 생활도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71년 10월 중화민국(대만)의 유엔 퇴출, 1972년 대만·일본 단교, 1979년 대만·미국 단교 등으로 해외 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러던 중에 1979년 2월 인도네시아 여권을 사용해 일본 입국을 시도했고, 이게 문제가 돼 1년간 일본 입국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 일로 대만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 등려군은 미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에 등려군의 노래들이 중국 대륙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대만 정부는 등려군의 인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만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1980년 9월 등려군은 대만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기대됐던 대륙에서의 공연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등려군의 노래를 금지했고 금지 초치는 1987년까지 이어졌다. 대신에 등려군은 대만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군 위문 공연을 적극적으로 다녔다. 등려군이 38세였던 1991년, 중국 본토와 마산관측소에서 중국 본토를 향해 선전 방송을 했다. 마산관측소는 건너편 중국에서 약 7km 박에 떨어져 있지 않을 만큼 인접한 위치다.

그는 당시 선전 방송에서 "저는 대륙의 동포 여러분도 우리들과 함께 똑같이 민주와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며 "오직 자유, 민주, 그리고 풍요로운 생활환경 속에서만 개인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등려군 "또 모든 청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때에서야 국가의 미래가 빛과 희망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라며 "머지않아 이곳에서 다시 돌아와 진먼전선의 형 형제 여러분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물론 대륙 연안의 동포 여러분들과도 역시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 했다.

등려군의 청아한 목소리는 대만군의 초대형 스피커를 통해 중국 본토로 퍼져나갔다.

대만의 가수 등려군이 1989년 5월27일 홍콩에서 열린 '민주의 노래를 중화에 바치다' 음악회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중국 민주화 운동 지지…결국 이루지 못한 중국 콘서트

등려군은 1989년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학생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다.

1989년 5월27일 등려군은 홍콩에서 열린 '민주의 노래를 중화에 바치다'라는 마라톤 음악회에 참석, '군개입 반대'(反對軍管), '민주만세'(萬歲民主)가 적힌 띠를 이마에 두르고 약 30만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한 방송에서 "내가 중국에서 공연하는 그날은, 우리의 삼민주의(三民主義)가 중국에서 실현되는 그날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의 민주화라는 그의 꿈은 같은 해 6월3일 발생한 톈안먼 사태가 발생하면서 좌절된다.

그는 본래 1990년 부모가 출생한 중국 본토에서 첫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중단됐다. 그는 "꿈은 죽임을 당했고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었다"며 슬퍼했다.

결국 그는 살아생전 양친의 고향인 중국 본토를 밟아보지 못했다. 그는 1995년 5월8일 태국 치앙마이의 한 호텔에서 천식 발작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때 나이 42세였다. 그는 현재 대만 신베이시 진산구 진바오산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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