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베트남, 한국식 '재벌' 키워 성장률 10% 노린다"
FT "정부가 토지·금융·대형사업 밀어줘 국가대표 기업 육성"
韓 재벌식 압축성장 벤치마킹…"독과점·중소기업 구축 부작용도"
- 신기림 기자
(서울=뉴스1) 신기림 기자 =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이 한국의 '재벌(chaebol)'을 본뜬 대기업 주도 경제 성장에 나서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평가했다. 정부가 유망한 토종 대기업에 대형 국책사업을 맡기고 토지와 금융 접근을 지원해 '국가대표 기업'으로 키운 뒤 이들을 앞세워 경제성장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베트남 최고지도자인 또 럼 공산당 서기장이 대대적인 관료·경제 개혁의 일환으로 한국의 재벌 모델을 재현해 자국의 대형 민간기업을 국가대표 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FT가 11일 보도했다.
한국이 1960년대 이후 압축적인 산업화를 이룬 방식을 베트남이 2020년대 적용한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가족 소유의 다각화된 대기업 집단에 각종 인센티브와 저금리 금융,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엄격한 수출 목표를 제시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대기업들이 투자를 확대하고 해외시장에 진출하면서 한국 경제의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설명이다.
베트남 역시 이와 비슷하게 정부가 선택한 대형 민간기업에 대규모 프로젝트와 금융·토지 지원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성장의 새로운 축을 만들려 한다고 FT는 분석했다.
그동안 베트남 경제는 외국인 직접투자(FDI)와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특히 미중 무역갈등 이후 중국을 떠난 글로벌 제조업체들의 생산기지를 유치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현재 미국은 베트남 전체 수출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하지만 미국의 관세정책으로 세계 무역질서가 흔들리면서 외국기업과 수출에 의존하는 성장모델에서 벗어나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키울 필요성이 커졌다. 과거 성장을 주도했던 국영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막대한 부채와 부패 문제에 시달렸다는 점도 민간기업 육성으로 방향을 돌리는 배경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트남 최대 민간기업 빈그룹이다. 억만장자 팜녓브엉이 지배하는 빈그룹은 56억달러 규모의 하노이~하롱베이 고속철도 사업을 맡았다. 총연장 120㎞로 완공되면 현재 2시간30분 걸리는 이동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든다.
베트남에서 이런 대규모 인프라 사업은 전통적으로 국영기업의 영역이었다. FT는 민간 복합기업인 빈그룹에 고속철 사업을 맡긴 것을 베트남 경제정책의 큰 전환으로 평가했다. 빈그룹은 이미 최소 2개의 고속철도 사업을 따냈으며 하노이 지하철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같은 정책 전환의 토대가 지난해 발표된 '결의안 68호'다. 베트남 정부는 민간부문을 "국가경제의 가장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규정하고 2030년까지 글로벌 가치사슬에 참여할 수 있는 대기업을 최소 20곳 육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민간기업 수도 2030년까지 200만개로 두 배 늘릴 계획이다.
응우옌 바 훙 아시아개발은행(ADB) 관계자는 결의안 68호에 대해 "한국 재벌 모델에서 일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빈그룹 외에 자동차업체 쯔엉하이그룹(타코), 철강업체 호아팟그룹, 정보기술·통신기업 FPT 등이 잠재적인 '베트남판 재벌'로 거론된다. 타코는 베트남 전역을 잇는 670억달러 규모 남북 고속철도 사업 입찰에도 참여했다.
베트남은 지난해 8% 성장한 데 이어 앞으로 5년 동안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최소 1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FT는 한국의 재벌 모델을 단순한 성공 사례로만 평가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재벌들은 한국 경제를 빠르게 산업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독과점을 형성하고 중소기업의 성장 공간을 잠식하는 부작용도 낳았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훙 ADB 관계자는 "길을 개척하는 몇몇 대표기업을 두는 것은 타당하다"면서도 이들이 국내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독점적 지위를 형성하고 대기업 육성의 혜택이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 지원이 잘못된 산업에 집중되면 공공자원이 낭비될 위험도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 5월 베트남의 기업 레버리지 비율이 동아시아 주요 경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하고 은행권도 유동성 제약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은 베트남의 정책 방향에 대해 "대체로 옳다"고 평가하면서도 관건은 실제 정책 집행이 개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느냐라고 지적했다.
shinkir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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