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붉은 기름: 녹색 황금과 팜유 [동남아시아 TODAY]

최기룡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원

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

최기룡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원
끝없는 녹색 물결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는 길에는 기차 대신 버스를 타고 다시 긴 여행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우즈랜드 검문소가 아닌 서쪽에 위치한 투아스(Tuas) 검문소와 술탄 아부 바카르(Sultan Abu Bakar) 검문소를 지나 노스-사우스 고속도로에 올랐다. 한국과 달리 2층으로 된 고속버스 맨 앞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다시 눈에 담았다.

고층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도시국가 싱가포르와 접경도시인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울창한 녹음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열대우림 지역이었던 이곳에 길을 만들고 도시를 세워나가기 여간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길 즈음, 창밖 경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큰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춰 지평선 끝까지 늘어선 녹색 물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으나 우리에게 팜유로 알려진 기름 야자나무였다. 끝이 없는 녹색 물결이 산등성이를 넘실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고 말로만 들었던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을 직접 마주친 첫인상은 지금도 선명하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녹색 물결이 한 시간을 훌쩍 넘어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다. 조호르바루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고속도로가 지나는 조호르, 느그리 슴빌란, 슬랑오르 세 주가 모두 반도 말레이시아의 주요 팜유 생산지였다.

팜유 플랜테이션의 확산
말레이시아 셀랑고르주 이족(Ijok)의 한 농장에서 수확 작업 중 한 근로자가 기름야자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있다. 2025.05.14 ⓒ 로이터=뉴스1

동남아시아의 열대 지방은 오랫동안 단일작물 재배의 무대가 되었다. 적도를 끼고 펼쳐진 열대우림, 연중 풍부한 강수량, 기름진 토양은 대규모 플랜테이션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는 고무, 필리핀에서는 바나나, 태국에서는 사탕수수와 카사바를 대규모로 재배할 수 있었다.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그 이름만 바뀔 뿐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 구조는 식민지 시대 만들어졌다. 16~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에 후추, 정향 등 향신료를 재배했고, 영국도 말레이 해협 거점을 확보하며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며 플랜테이션 구조를 이식했다. 19세기 들어서 영국이 말레이시아에 고무나무를 들여왔다. 20세기 이후 고무 농장이 점차 팜유 농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숲을 밀어내야 했고, 많은 외국자본이 유입되었으며, 세계 시세에 따라 지역이 움직이게 되었다. 팜유는 이 긴 역사의 가장 최근 버전이다.

팜유는 과자, 초콜릿 같은 가공식품부터 세제, 화장품, 바이오 연료까지 현대인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원료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통계에 따르면 1980년 500만톤에 불과했던 세계 팜유 생산량은 2023년 약 8000만톤으로 40년 만에 약 16배 급증했다.

팜유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고무 농장을 빠르게 대체하며 주력 상품이 되고 있다. 현재 팜유는 인도네시아가 전 세계 생산량의 59%, 말레이시아가 23%를 담당하며 세계 팜유 시장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끝없는 녹색 물결이 녹색 황금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붉은 기름 팜유의 두 얼굴
말레이시아 폰티안의 한 농장에서 한 농부가 수확한 기름야자나무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 2025.04.24 ⓒ 로이터=뉴스1

팜유는 다른 식물성 기름과 달리 큰 효율성을 자랑한다. '아워 월드 인 데이터'(Our World in Data)의 한나 리치(Hannah Ritchie)에 따르면 1헥타르에서 연간 약 3톤 이상의 팜유 생산이 가능하다. 이와 달리 같은 면적에서 해바라기유나 유채유는 0.7톤, 대두 기름은 0.39톤을 생산하는 데 그친다. 코코넛 기름이나 땅콩기름은 약 10~15배의 재배면적이 필요하다. 팜유가 전 세계 식물성 기름 작물 재배면적의 8.6%만으로 전체 생산량의 36%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팜유는 나쁜 기름이라는 오명도 함께 가지고 있다. 열대 우림과 산림을 파괴하여 오랑우탄 서식지가 사라지고, 탄소를 흡수하던 숲이 없어지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기후변화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백~수천 년 동안 막대한 탄소를 저장해 온 이탄지를 개간할 경우 대량의 탄소가 방출될 수 있다는 일부 연구는 바이오 연료로서의 탄소 감축 효과를 오히려 깎아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환경 논란으로 인해 유럽연합(EU)은 삼림전용방지규정(EUDR)을 통해 팜유 생산이 삼림파괴와 무관하다는 점을 생산국이 직접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인도네시아 팜유 협회(GAPKI) 에디 마르토노(Eddy Martono) 회장은 이 규정이 시행되면 EU 수출이 30% 줄어들 것이며, 이를 무역을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비난하며 시행 연기를 촉구했다. 말레이시아 팜유협회(Malaysian Palm Oil Council)도 현실성이 떨어지며 특히 소규모 농가가 공급망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앞서 EU가 재생에너지지침(RED Ⅱ)을 도입해 팜유 기반 바이오 연료 사용을 제한하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세계무역기구(WTO)에 EU를 제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2026년 1월 인도의 팜유 수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51% 급증해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중국도 같은 기간 수입을 크게 늘리며 동남아 팜유의 주요 고객으로 부상한 것이다.

올해 2월 인도 모디 총리가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도 두 정상이 만나 팜유 가치사슬 개발 협력에 합의했으며, 고부가가치 팜 기반 제품 협력에 합의했다.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중국에 팜유 수입 확대를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팜유 교역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환경 규범을 내세운 유럽의 압박이 오히려 중국과 인도 경제권으로 기울게 하는 역설을 낳을 수도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녹색 황금의 미래
말레이시아 수방 자야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 사람이 팜유로 만든 식용유 병을 들고 있다. 2022.03.08 ⓒ 로이터=뉴스1

이처럼 한 작물의 무역구조가 국가 간의 정치·경제적 관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팜유가 왜 녹색 황금으로 불리는지를 새삼 보여준다. 사실 녹색 황금은 팜유만을 상징하지는 않으며,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작물을 모두 이른다. 19~20세기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에서는 고무가, 자바에서는 사탕수수와 담배 등이 대표적인 녹색 황금이었다. 지금 가장 주목받고 있는 녹색 황금의 대표 작물은 팜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석유 부국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팜유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경우 1989년 우지(동물성 기름) 파동 이후 식물성 기름 중심의 식품 가공 산업에 나서면서 값싸고 다루기 좋은 팜유 수입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 사단법인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가 2026년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2016~2025년 한국 팜유 수입 비중은 인도네시아가 약 47.6%, 말레이시아가 약 46.1%를 차지해 두 나라가 전체의 93.7%를 책임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로이터통신이 ‘저렴한 팜유 시대가 종말을 고할 수 있다’고 진단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8년부터 인도네시아는 모든 경유차량과 기계류에 팜유를 섞은 바이오 디젤 사용을 의무화했고 2026년 1월 그 비율을 40%로 올렸다. 말레이시아 팜유 협회는 말레이시아 사바와 사라왁주의 팜유 수확과 운송 차질로 팜유 생산이 2026년 17%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하고 있다. 팜유 생산국에서 수출 가능 물량이 줄어들수록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같은 국가들에 가격 상승은 물론 공급이 제대로 안 될 위험도 커진다.

그럼에도 녹색 황금으로서 팜유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적은 면적으로 많은 기름을 효율적으로 생산할 대체 작물이 아직 없으며, 수요 역시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기름과 나쁜 기름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지만 단순 이분법만으로 팜유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끝없이 이어지던 녹색 물결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한국인들의 식탁과 공급망에까지 닿아 있다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opini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