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위기에 높아진 목소리 "더러운 연료와 작별"[동남아시아 TODAY]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최근 동남아의 SNS에서는 에너지와 환경 관련 해시태그가 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나오는 '#에너지_위기에_맞서자'(#LawanKrisisEnergi)란 해시태그가 그 예시다.
이란-미국 간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 세계 에너지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 상황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에너지 억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4월 1일 '8대 에너지 절약 운동'을 발표하며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중앙정부 공무원은 매주 금요일, 지방정부 행정직 직원은 주 2회 재택근무가 의무화됐고, 민간 기업에도 이를 강력하게 권장하고 있다.
자카르타 등 주요 도시에서는 출퇴근 시간 홀짝제 차량 운행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고, 이를 고속도로 등 간선도로까지 확대 중이다. 국가 전체 연료 소비를 약 20%까지 절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한편, 수입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바이오디젤 도입 시기를 대폭 앞당겼다.
태국은 이보다 이르게 위기 대응에 나섰다. 전쟁 직후인 3월 초부터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전력 소비 절감을 위해 재택근무제를 시작했다. 사무실 에어컨 온도를 26~27도 이상으로 설정하고, 정장 대신 반소매 셔츠를 입도록 권장하는 복장 규제도 시행됐다. 사태 악화에 대비해 주유소의 영업을 밤 10시에 종료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필리핀 역시 이미 3월 중순부터 공공기관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더 강력한 정책을 펴는 곳은 베트남과 라오스다. 베트남은 유류 배급제와 가격 통제 대책까지 마련한 상태다. QR코드로 유류를 배급하거나 보조금을 투입해 가격 급등을 막는 방안을 검토하고, 불필요한 야간 조명 쓰지 말기를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게다가 4월부터 석유 소비량의 10% 절감을 목표로 E10 바이오 연료를 풀었다. 이는 기존 계획을 두 달이나 앞당긴 것이다. 라오스에선 심각한 에너지 문제로 학교 수업 일수가 단축되거나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란 전쟁으로 지구적 에너지 위기가 커지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수요 억제를 위한 강제성 있는 정책도 마다하지 않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고강도 에너지 대책에 대한 각국 국민의 피로감은 물론 불안과 불만 역시 커지고 있다. SNS를 오가는 열쇳말로 보자면 무엇보다 물가 상승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다. 특히 오토바이가 주요 이동 수단인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유가 상승은 생계와 직결된다. 식료품 가격을 비롯해 생활 물가가 줄줄이 올라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영 에너지 기업의 부패와 비효율이 지금의 연료 부족을 만들었다. 중동 전쟁은 핑계일 뿐 진짜 전쟁은 정부의 무능과 싸우는 것"이라거나 "석유 수출로 번 돈은 다 어디로 갔나? 서민들은 오토바이 기름값이 없어서 출근도 못 하는데, 정치인들은 에어컨 빵빵한 차에서 에너지 절약을 논한다"며 정부와 정치인을 향한 날 선 비판도 눈에 띈다.
특히 산유국인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선 "산유국인데 왜 기름값을 걱정해야 하냐"는 볼멘소리도 터져 나온다. 산유국조차 작금의 에너지 대란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동남아시아에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말고도 태국과 베트남, 브루나이에서 석유나 천연가스가 산출된다. 다만 브루나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산량 감소와 자국 내 수요 급증으로 인해 점차 순수출국 지위를 잃었다. 요컨대 뽑아내는 양보다 자국에서 쓰는 양이 더 많아진 데다 기존 유전의 노후화, 국내 원유 수요 증가, 정유 시설 문제 등이 겹치면서 '석유 위기를 겪는 산유국' 처지가 된 것이다.
이에 동남아 사람들도 보조금을 주는 바이오 연료나 전기차, 전기 오토바이에 관심이 쏠리는가 하면 '기름값 아끼는 법' 같은 숏폼 콘텐츠가 인기다.
한편에선 환경 문제로 눈을 돌리는 움직임도 떠오른다. 태국의 한 활동가는 "중동에서 총소리 한 번 나면 멈추는 경제가 정상인가? 이번 기회에 화석 연료 보조금을 다 없애고 태양광과 전기차 보급에 쏟아부어야 한다. 기후 위기와 에너지 위기는 결국 하나다"라고 핵심을 짚는다.
인도네시아 환경 단체는 "정부가 석유 대신 팜유(바이오디젤) 비중을 높이겠다는데, 이건 기름값을 잡으려고 우리 열대우림을 다 밀어버리겠다는 소리다. 환경을 팔아 에너지를 사는 어리석은 짓을 당장 멈추라"고 외친다.
이번 위기를 겪으며 '더러운 연료와의 작별'(Farewell to Dirty Fuel)이 부각되고, 화석 연료 시스템의 종말, 환경 정책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부쩍 높아지고 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아무도 원치 않은 중동의 전쟁이 지구촌 곳곳에 에너지 위기의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동남아 산유국들도 피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지구의 허파'라는 동남아에서 이번 전쟁을 계기로 에너지 주권과 환경 문제에 경각심이 높아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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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