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성범죄 척결" 비웃은 '갓갓'-조주빈…혜화역시위 때 n번방·박사방 오픈

지난 5일 통과된 성폭법 개정안에도 디지털성범죄 처벌 제외
"불법촬영 담론 아직도 부재…이제라도 기초체력 쌓아야"

2018년 10월6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일대에서 열린 제5차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시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서울=뉴스1) 유경선 기자 = 2018년 한 해는 불법촬영 범죄를 규탄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일명 '혜화역 시위'가 잇따르며 불법촬영 규탄 메시지가 처음으로 광장에서 분출됐다. 불법촬영 범죄 근절에 제도적으로 큰 진전이 이뤄질 것 같은 기대가 생겨나는 시기였다.

혜화역과 광화문에서 "불법촬영은 찍은 사람, 유포한 사람, 본 사람 모두 범죄자"라는 메시지가 나올 동안, 텔레그램에서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착취 모습이 담긴 촬영물이 버젓이 돌아다녔다. 텔레그램 'n번방'과 '박사방'도 모두 혜화역 시위가 한창이던 2018년 처음 문을 열었다.

2018년 5월부터 12월까지 6차례 진행된 혜화역 시위가 '갓갓'과 '박사' 조주빈(25) 및 이들에게 동조한 수많은 가해자들을 막지 못한 까닭은 결국 시위의 핵심 메시지가 실질적인 법과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카르텔 근절해라' 외침, 불완전 입법으로 귀결

혜화역 시위는 개최 때마다 주최측 추산 수만명의 참가자가 모여 불법촬영 문제에 대해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2018년 5월, 6월, 7월, 8월, 10월, 12월을 거치며 시위가 이어졌고 우리 사회도 주목하는 듯했지만 같은 기간 '갓갓'과 '박사'는 텔레그램에서 세를 키웠다.

생물학적 여성만 참가했던 이 집회에서는 △불법촬영물 생산·유통·소비는 가담자 모두를 범죄자로 엄히 처벌해야 하지만 실제 수사·판결에서는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는 경우가 많고 △불법촬영물 유통 및 피해자에게 영상삭제 비용청구 등을 통해 돈을 버는 웹하드 카르텔을 뿌리뽑고 △국회에 계류 중인 여성 안전 관련 법안을 조속히 처리하고 여성가족부 예산을 확충할 것을 요구했다.

혜화역 시위의 규모와 메시지가 주목받으면서 정부도 귀를 기울였다. 시위를 주최한 '불편한 용기' 운영진은 불법촬영 문제 관련 부처인 여가부, 행정안전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법무부, 교육부,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와 간담회를 열고 문제를 논의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취임 후 첫 공식 외부 일정으로 혜화역을 들러 "여성대상 범죄를 근절할 것"이라고 말했고, 광화문에서 열린4차 집회 때는 현장을 둘러보며 집회를 적극 지원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정부도 2018년 6월에는 불법촬영을 '문명사회에 있을 수 없는 중대범죄'로 간주한다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고 △'몰카' 탐지기 재원 확보 및 공중화장실 일제점검 △불법촬영 다발 시간·장소 예방 및 단속 강화 △불법촬영물 공급자 수사 강화 △해외 수사기관과의 공조수사를 약속했다.

불법촬영 범죄를 규탄하는 여성단체 ‘불편한 용기’가 2018년 12월2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 6차 마지막 집회를 하고 있다.2018.12.22/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하지만 이렇게 지펴진 불은 지난 5일 국회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을 일부 개정하면서 맥없이 꺼졌다. 연예인이나 지인의 사진을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물을 만든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내용이 추가됐을 뿐, 디지털성범죄를 폭넓게 수사·처벌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은 국회 국민동의청원 1호이기도 했지만, 결국 'n번방' '박사방'을 실질적으로 막을 수 있는 성과를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이제라도 논의 시작해 처벌 강화해야"

여성 문제 활동가들은 혜화역 시위가 결국 실질적인 형사적 제재를 가져올 제도적 장치 마련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혜화역 시위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논의 기회가 있었지만, 우리 사회가 불법촬영 문제를 심도있게 숙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불법촬영 등 성범죄 피해를 입은 여성을 변호해 온 이은의 변호사는 "'박사'나 '갓갓'은 아예 혜화역 시위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라며 "시위가 아니라 처벌만이 위협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도 "남성 중심의 성착취 문화를 제대로 근절하지 않아 처벌이 확실히 이뤄지지 않은 게 핵심"이라고 꼬집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갓갓'이나 '박사' 모두 자신들의 행위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혜화역 시위를 보면서도 '나는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불법촬영 문제는 해묵은 주제이고, 이번 텔레그램 사건도 사실 새로운 게 없는데도 이 사회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한 적이 없다"며 "아직도 사회가 쌓은 담론이 없는 것이고, 이제야 관심을 갖게 됐으니 입법을 위한 연구를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사회가 아직 당장 입법단계로 나아갈 정도의 숙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성착취물'을 방지하는 법안을 만들겠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성착취인지, 양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의해야 하는데 관련분야 '기초체력'이 없는 셈"이라며 "이제라도 자원을 투입해서 해외 사례를 수집하고, 공청회와 간담회를 통해 구체적인 입법 노력에 돌입해야 하는 단계"라고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텔레그램 사건은 피해 수위가 높고 미성년자 피해자가 있는 데다, 혜화역 시위 같은 노력 속에 인식이 개선되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것"이라며 "이 기회를 잡아 디지털성범죄의 범위와 처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소장은 "'박사'라는 괴물만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박사'의 행위에 돈을 내고 동조하고 그에게 환호해준 사람들에 주목할 때"라고 강조했다.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2020.3.25/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kaysa@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