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할아버지 만나러 갈래?"…1형 당뇨 부녀 10박11일 170㎞ 대장정

[4.5만명의 전쟁]⑥1형 당뇨 '편견 깨기'…폭력적 방법 '싫었다'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일어설 추억 만들어주고 싶어"

편집자주 ...건보 통계상 우리나라 1형 당뇨 유병인구는 4.5만명입니다. 체내에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아 생기는 1형 당뇨는 아직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완치가 안 되는 질병입니다. <뉴스1>은 병과 생활고, 무관심 속에서 이중·삼중으로 전쟁을 치르는 1형 당뇨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박근용씨와 1형 당뇨를 앓는 딸 율아가 서로 포옹하고 있다. (박근용씨 제공) 2024.2.16/ 뉴스1 ⓒ News1

(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발에 잡힌 물집은 이미 터졌다. 햄스트링(허벅지 뒤 근육)은 뻐근하다 못해 후들거린다. 사실 치아 빼고는 온몸이 다 아픈 것 같다. 지난 열흘 동안 쉬지 않고 150㎞를 넘는 거리를 걸은 탓이다. 하지만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세종에 사는 박근용(47·남) 씨는 1형 당뇨를 앓는 둘째 딸 율아(8·여)와 함께 지난 7일부터 세종시에서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을 향해 오로지 두 발로만 '뚜벅뚜벅' 걸었다. 무려 10박11일, 총거리 170㎞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사람들에게 1형 당뇨에 대해 알리고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직접 호소하기 위해서다.

근용 씨는 지난 15일 뉴스1과 통화에서 "삭발이나 단식 투쟁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생각했지만 율아가 나중에 커서 사회에 가진 불만을 폭력적으로 해소하는 법을 배울까 봐 고민을 많이 했다"며 "대신 '우리 대통령 할아버지 한 번 만나러 갈래'라고 물어보니 율아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근용 씨는 어른에게도 힘든 여정을 어린 딸과 견뎌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형 당뇨를 향한 세상의 편견에 부딪히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 나중에 사춘기를 겪을 율아가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어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길 바란다.

근용 씨와 율아는 17일 오후 마지막 목적지인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 도착할 예정이다. 근용 씨는 "윤 대통령님이 만나 주실지는 모르겠다"며 "만약 만나게 된다면 대통령님이 율아에게 '고생했다' 한 마디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근용 씨와의 일문일답.

-처음에 이 여정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태안 사건 이후로 여러 곳에서 1형 당뇨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는데 실질적으로 큰 개선책이 나오는 건 없었고 아이들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상황이다. 언론에도 여러 차례 인터뷰했지만 불쌍한 사람으로만 비쳐서 뭔가를 좀 하고 싶었다. 삭발, 단식 투쟁 이런 걸 생각하다가 율아가 나중에 크면 사회에 가진 불만을 폭력적으로 해소하는 법을 배울까 봐 고민을 많이 했다. 율아에게 '우리 대통령 할아버지 한 번 만나러 갈래' 물어보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

박근용씨가 딸 율아의 발을 문지르고 있다. (박근용씨 제공)

-율아와 함께 걷기로 한 이유는.

▶율아와 같은 아이들이 나중에 사춘기 시절에 안 좋은 선택을 많이 한다. 워낙 힘들다 보니까. 아이가 나중에 아빠와 함께 이렇게 걸었던 시간을 기억했으면 좋겠고 훗날 정말 힘든 일이 찾아왔을 때 아빠가 얼마나 우리 율아를 사랑했는지, 율아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잊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추억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다.

-열흘 동안 걸어오시면서 힘든 일은 없으셨나.

▶거의 목숨 걸고 걸어온 것 같다. 아이가 힘들면 실어서 가려고 카트도 끌고 왔는데 길이 비포장도로면 정말 힘들더라. 발에 물집 잡힌 건 이미 터졌고 온몸이 다 아프다. 그런데도 아이와 이렇게 걷는 시간이 행복해서 뭐라고 표현이 안 된다. 많은 분들이 알아보고 응원해 주시고 음료나 다과를 갖다주시는 분도 계셔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기분이 어떠셨나.

▶사실 처음에 아내도 반대했고 김미영 (1형당뇨환우회) 대표님도 반대했고 저희 부모한테는 말씀도 못 드렸다. 첫날과 둘째 날은 힘들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출발해서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아직 안 나은 상태다. 과연 올바른 행동을 하는 건지, 아이를 위하는 것이 맞는 건지 고민이 많았다. 3일째부터 괜찮아지더라.

-중간에 설 연휴도 있었는데

▶명절 때는 문을 연 식당이 없어서 고생했다. 가끔 편의점 음식 같은 것으로 때우기도 했는데 중간중간에 저희를 알아보시고 김밥도 사다 주시는 분도 계셔서 식사를 했다. 그 부분은 율아한테 조금 미안하다.

-여정 중에 아빠한테 율아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집에서 둘째라 아빠랑 이렇게 둘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하고 아빠가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많은 분이 율아에게 선물도 주시고 함께 걸어주시기도 해서 율아가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율아에게 보여줄 수 있어 행복하다.

박근용씨와 율아의 여정을 보며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다. (박근용씨 제공)

-율아는 괜찮은지. 오랫동안 걷는 게 힘들고 지칠 법한데.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다니고 있다. 연속혈당측정기를 차고 인슐린을 맞으면서 이렇게 건강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이 10일 동안 증명이 된 것이다. 율아는 학교에서도 당당하게 주사를 맞고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1형 당뇨 환자 중에서는 인슐린을 수령할 때 혹시나 누가 볼까 봐 밤에 마스크를 쓰고 약국에 가는 분도 있다. 동네 사람에게 소문날까 봐… 편견 때문에 그렇다.

-1형 당뇨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심하다고 보는지.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1형 당뇨는) 입소를 불허하는 경우도 있다. 사설도 아니고 국공립 교육시설이 거부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시작부터 아이들은 숨는 걸 강요받고 있다. 식당에 가면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주사 놓는 걸 불편해하고 학원에서도 잘 안 받아준다. 다른 학부모님들은 아이들이 같이 못 놀게 한다.

-만약 윤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

▶일단은 율아한테 '고생했다'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1형 당뇨에 대해 좀 알아주시고 관련 부처에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관련 부처에서) 많이 도와주셨고 진전된 것도 있지만 미미하다. 2월부터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펌프는 19세 미만에게 자기부담금 10%만 내도록 지원해 주고 있는데 전체 1형 당뇨 환자 4만6000명 중 19세 미만은 3700명밖에 안 된다.

-환우회에서는 중증 난치질환, 장애 인정 요구도 했는데.

▶율아의 꿈은 경찰이다. 하지만 현행법상 1형 당뇨는 경찰과 군인, 소방관이 될 수가 없다. 잘못한 것도 없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1형 당뇨를 중증 질환이나 장애로 인정한 것도 아니다. 장애를 심사하는 기준으로 신장, 심장, 대장, 요루, 간 등 각 세부항목이 있는데 1형 당뇨인들이 앓고 있는 췌장 장애만 없다. 세부 기준 자체가 없으니 장애 심사도 되지 않는다. 멀쩡한 사람이 췌장을 떼어내도 장애가 인정되지 않는 셈이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면 17일에는 낮 12시쯤 용산 대통령실 앞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후에는 대통령님이 만나 주실지 모르겠기에 구체적으로 계획한 일정은 없다. 방학이고 서울에 기왕 올라왔으니 놀이공원에라도 가서 율아와 놀아주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 News1 김지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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