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목격자가 44년만에 말하는 '서울의 봄' 전두환[이기범의 리스펙트]
당시 특전사령부 보안반장 김충립씨 "12·12는 구국행위 아니다"
반란군 협력했던 과거 회한 "역사적 진실 알리고 국민 대통합해야"
- 이기범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기자 = 김충립씨(78)는 여행용 가방(캐리어)을 힘겹게 끌고 왔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꾹 눌러 담았다는 듯 10여권의 책과 자필 기록을 꺼내 보였다. 화이트보드에 판서를 하며 그날을 둘러싼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는 1979년 12월12일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으로 군사 반란을 직접 목격했다.
<뉴스1>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공유오피스에서 김씨를 인터뷰했다. 그는 자신의 벗겨진 머리가 전두환을 연상케 한다며 중절모를 벗지 않았다.
"12·12를 쿠데타가 아닌 구국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양심적으로 반성하고, 사실대로 얘기하길 바란다."
김씨는 그해 12월12일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최근 4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은 그날에 대한 현재 한국 사회의 기억을 재현했다. 김씨는 영화 속 특전사령부가 반란군에 점령당하던 그때 실제 현장에 있었다.
◇특전사령부 지킨 김오랑 중령과 마지막 대화
김씨는 경북대학교 사범대를 졸업한 후 ROTC 6기로 임관해 주로 보안부대에서 근무하며 제5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을 목도했다. 특히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나던 때 반란군 쪽에 서 있던 그는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으로서 사령부가 점령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영화에서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오진호 소령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영화가 끝난 다음에 눈물이 흘렀다. 김오랑 소령과 마지막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고, 12·12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당시 상황에 대해 "(특전사령관) 비서실에 들어가니 김오랑 소령이 권총에 실탄 7발을 장전하고 있었다"며 "이럴 때 권총을 차고 있으면 죽는다고 설득했지만 김 소령은 지금 보안사에서 쳐들어온다며 사령관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고 밝혔다.
이후 정병주(영화 속 공수혁)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러 온 3여단 소속 부대원들이 M16 소총으로 사령관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김씨는 당시 3여단 15대대장 소속 박종규 중령이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사격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김오랑 중령은 6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후 의무실에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영화 '서울의 봄' 젊은이들에게 역사 알려…진압군 출동 못해"
김씨는 영화 '서울의 봄'으로 12·12 군사 반란이 재조명되고 있는 점에 대해 "젊은 분들이 1979년 12월12일에 있었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돼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개인적으로 크게 감명받았고 잘 찍은 영화"라고 평가했다.
이어 "대부분이 사실대로, 역사에 기록된 대로 잘 꾸려졌다"면서도 "12·12가 일어난 내막에 대한 얘기가 잘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전두환씨가 집권 야욕을 갖고 하나회를 만들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일련의 과정과 이때 벌어진 살인 행위 등 과오를 조금 더 디테일하게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또 영화와 실제가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영화 속에서 진압군과 반란군이 광화문 앞에서 대치하는 장면이나 장태완(영화 속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이 바리게이트를 넘어가는 장면 등은 흥미를 돋우기 위한 영화적 허구라고 짚었다. 실제로 진압군의 출동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장 사령관은 사무실에서 체포됐다.
영화 속에서는 장 사령관이 전씨의 대척점에서 선 군인 본분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김씨는 실제 장 사령관이 "군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으로 깨끗한 지휘관이었다.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모범 장군이었지만 하나회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거 대상이 됐다"고 평가했다.
◇"반란군 협력 후회…후세들에게 역사적 진실 알릴 것"
김씨는 당시 반란군의 편에 섰다. 정병주 사령관에 대한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 자신이 반란군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대해 김씨는 회한을 나타냈다. 그는 "반란군에 협조한 건 사실"이라며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거듭 표현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이 같은 동료 군인을 죽였다. 김씨가 신군부 세력과 결별한 후 미국으로 떠난 이유다.
김씨는 1980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미국 기독교 대학인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미주한인장로회 신학대학에서 교수 및 목사로 활동했다. 이후 2013년부터 5공 세력과 광주 사이에 화해의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2021년에는 5·18진실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을 맡았다.
이에 대해 김씨는 "5·18 묘지 참배를 하러 갔을 때 신군부 세력이라고 쫓겨나기도 했다"며 "반란군 일원으로 12·12에 희생된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5·18 때 돌아가신 분께도 명복을 빌고 사과한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전두환·노태우 시절을 옹호하고, 북한군 개입설 등 5·18 역사 왜곡이 반복되는데 대해선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12·12를 쿠데타가 아닌 나라를 구하기 위한 혁명으로 기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목숨을 잃은 김오랑 소령을 비롯해 참모총장 공관에서도 사람이 죽고 연행됐다. 12·12 당시 발포 명령에 대한 조사나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 인물들은 지금도 살아서 거짓말과 자기변명만 할 뿐 사과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다는 걸 후세들이 알아야 한다."
특히 그는 역사적 진실을 바로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적인 화해와 대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호소했다. 현재 김씨는 5공 세력의 집권 과정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
김씨는 "군인은 군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직업이지 그걸 이용해 세력을 형성하고 쿠데타를 일으켜선 안 되며,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며 "이 같은 진실을 밝혀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한 차원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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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혐오로 얼룩진, 존중이 사라진 시대.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이야기를 통해 '존중'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