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피해 달아난 북한"…'째포'는 일본으로 향했다①[이비슬의 B터뷰]

재일교포북송 피해자 리소라 인터뷰…北 상대 손배소
"탈북 추적당해 극약 먹고 죽으려 해…삶 근원 찾고파"

리소라 모두모이자 사무국장이 서울 종로구 공유오피스에서 뉴스1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3.6.16/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서울=뉴스1) 이비슬 박지혜 기자 = 탈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북한에서 리소라씨(53)는 '없는 죄도 뒤집어쓰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재일교포의 자녀인 그에게 차별은 일상이었다. 한 번의 시도에도 목숨을 거는 각오가 필요했다.

리씨는 "북한 토박이는 탈북하려다 잡혀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저와 아이들은 시범사례가 돼서 사형당할 가능성이 높아 공포가 너무 컸다"며 "절대로 국경을 넘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리씨는 북한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함께 살던 부모님을 떠나 1960년 북한행 배에 올랐다. 북한과 일본 적십자가 주도한 재일교포북송사업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재일교포의 자녀라는 꼬리표는 리씨를 평생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째포'라고 놀림당하거나 원하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 일, 남편의 승진이 누락된 이유도 모두 자신의 신분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리씨는 "북한에서 네살 때부터 차별받은 기억이 생생하다"며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고 말했다.

1959년 재일한국인을 싣고 일본 니가타항을 출발한 북송선 소식을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리소라씨 제공)

◇ "북한 침투한 '마약'…체중 감량에 쓰기도"

탈북은 서른여섯이 되던 해 결심했다. 마약 때문이었다.

"옆집 엄마가 오밤중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우리 집 문을 두드렸어요. 마약에 중독된 고등학생 아들에게 폭행당했다는 겁니다." 2006년 겨울밤을 떠올리는 리씨 표정에 또 한 번 긴장감이 깃들었다.

머릿속엔 평양의 친척집에 맡겨둔 아홉살 딸 걱정이 가장 먼저 스쳤다. 북한에 마약이 퍼져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학생들까지 마약에 손댄다는 사실은 처음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딸이 다니던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상급 학생들도 마약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며 "알아보니 시험 기간에 공부에 집중하거나 쾌락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마약 중독자가 길에 쓰러진 모습도 심심찮게 보았다. 폭행이나 강도도 만연했다. 아이들만 집에 둔 날에는 리씨 자신의 형제·자매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긴장 속에 살아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그는 "경제 상황이 나빠 풍체가 좋거나 비만인 사람은 '착취했다'는 인식 탓에 길에서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며 "고위층과 그들의 자녀가 체중 감량에 마약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가와사키 에이코 모두모이자 대표(오른쪽)와 리소라 사무국장이 서울 종로구 공유오피스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23.6.16/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 "TV로 본 남한 국회 몸싸움…현실을 봤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떠나야만 했다. 리씨는 "무리 중 한 아이의 부모가 마약을 사용하면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약이 퍼지고 있었다"며 "마약 없는 지역을 찾아 농촌을 뒤졌지만 아이들과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7년 겨울. 북한과 중국 국경을 맞댄 도시 혜산에서 도강(渡江)을 계획했다. 사전 답사를 위해 먼저 방문한 중국에서 TV로 본 한국 모습이 그의 탈북 결심을 굳혔다.

리씨는 "국회에서 싸움하는 뉴스, 수해 피해를 본 노숙인이 힘들다고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고 북한과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며 "그동안 북한에서 한국 영화를 봐도 체제선전을 위해 가장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현실을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탈북했다. 따로 출발한 남편이 국경을 향해 오던 중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씨는 "남편을 구하러 돌어가야 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며 "'지금 돌아가면 아이들은 어쩌나'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남편을 두고 중국 내륙 더 깊이 들어갔다"고 그때를 돌아봤다.

"지금도 죄스럽다"고 말하던 그의 표정엔 복잡한 심경이 스쳐갔다.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품에 지닌 극약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죽으려 했던 상황을 설명하던 순간엔 가녀린 체구로 겪어낸 고난이 느껴졌다.

지난해 12월 재일교포북송사업 피해자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리소라씨 제공)

◇ 무엇이 나를 '째포'로 만들었나

가까스로 피신한 베이징 일본대사관에서 일본이나 한국행을 제안했다. 리씨는 "북송사업이 무엇이길래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지 알고 싶어 일본으로 갔다"며 "정작 일본에 계신 분들도 재일교포북송사업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을 보고 이 문제를 누군가는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리씨 모친을 포함한 재일교포 약 10만명이 1959년부터 20여년간 북한으로 이주했다. 당시 경제 성장 중이던 북한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 정부는 전후 자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연간 2억엔의 생활 보조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책임부담이 컸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재일교포북송사업은 25년간 활발히 전개됐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는 사업을 홍보하며 집과 일자리, 무료교육을 약속했지만 이주자들이 북한에서 마주한 것은 차별과 경제적 고난이었다.

리 사무국장이 2014년 재일교포북송사업 피해자 지원을 위한 인권단체 '모두모이자' 활동을 시작한 배경이다. 모두모이자는 2018년 북한 정부를 상대로 북송사업 피해자에게 1억엔을 보상하라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 7월 일본에서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계속>

b3@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