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기초 쓴 최남선…왜 '민족대표 33인' 빠졌을까

"학자로 일생 마칠 것…독립운동 표면 못 나서" 이유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준비 중인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3ㆍ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별전에 기미독립선언서가 전시되어 있다. 2019.2.21/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의 당위성과 독립국으로서의 조선, 자주민으로서의 조선인을 선언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전 민족이 일제 식민지 지배에 맞서 떨쳐 일어난 3·1운동의 시작이었다.

천도교 대표 15인, 기독교 대표 16인, 불교 대표 2인 등이 서명한 선언서는 그해 2월28일부터 2만1000장이 인쇄돼 전국 각지에 뿌려졌다. 이어 3월1일 서울 인사동의 요리점인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각각 열린 선언식에서 낭독됐다.

선언서의 초안은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문인 육당 최남선이 작성했다. 그는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는 인물로, 일찌기 도쿄에서 유학하며 신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잡지 <소년>을 발간하는 등 출판과 집필 활동을 활발히 벌여 왔다.

천도교 인사인 최린이 그를 선언서 작성자로 추천한 것도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명성과 문장력 등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최남선은 이 일로 3·1 운동의 주동자로 지목, 체포돼 일제로부터 2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최남선은 초고를 작성하고도 정작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서는 빠졌다.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 작성에는 참여하겠다는 것이 그의 의지였다.

뒤늦게 만해 한용운이 독립운동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며 자신이 선언서를 쓰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선언서 초안이 완성돼 다듬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한용운이 여기에 공약 삼장을 덧붙이면서 우리가 아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완성됐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인도주의와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한 비폭력·평화적 독립을 제시했으며 3·1 운동의 도화선을 당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정작 선언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게 크게 기여했던 최남선은 1927년 조선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친일 협력에 뛰어들면서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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