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은 꿈에도 안꿔"…北 고향에 20년째 편지

조총련 통해 400통 주고 받아…생필품도 보내
남북이산가족협의회, 생사확인·편지교환 지원

김주길 할아버지(가명·82)가 북한에 있는 동생들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 있다. © News1 박응진 기자

"이젠 명자도 대가정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의 응석받이였던 명자 그대로입니다. 제가 늘 명자한테 지고 말지요. 하하하"

"형님들!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 그리고 우리 가족사진 일부를 보냅니다. 사진에 재간 없는 제가 찍다보니 광선 조절을 못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성진으로 가는 길이 말입니다. 금년에 그곳에서 은어가 많이 잡혔습니다. 명태는 좀 늦어서 나는가 봅니다."

함경남도 북청군이 고향인 김주길 할아버지(가명·82)는 20여년 전 북한에서 처음으로 온 편지를 읽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그가 북한의 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하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1990년대 초반 미국 시민권자인 고향친구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가족소식을 전해주면서 누이동생(명자·가명·72)과 사촌동생(정호·가명·77)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개월만 있으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던 정부의 약속이 허망해진지 오래고 어느덧 40여년이 흘러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보낸 편지는 중국 브로커를 통해 누이동생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배달사고가 잦아졌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직접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한국에 처자식을 남겨둔채 일본에서 지낸 기간만 7년이나 된다. 북한에 있는 부모와 가족 소식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후 "편지를 빠짐없이 보내주겠다"는 조총련계 지인의 약속을 받고서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고 지금까지 1년에 10여차례씩 동생들과 편지를 주고 받거나 간간이 생필품을 보내주고 있다.

할아버지는 "동생들이 '장군님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낸다'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아 가끔은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면서도 "가족 소식을 들을 때면 한 없이 기쁘고 물건을 잘 받았다는 답장이 올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 같아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주길 할아버지(가명·82)가 받은 편지와 북한 동생들에게 보내줄 오징어 낚시도구. © News1 박응진 기자

하루는 양복을 사서 보내자 사촌동생의 조카가 답장을 보내왔다. "옷이 나한테 꼭 맞습니다. 할머니께 일년에 쌀밥 한번 대접 못하는 형편인데 너무 기뻐서 어제 밤에는 옷을 안고 잤습니다".

최근에는 사촌동생이 오징어 낚시도구를 보내달라는 부탁에 따라 2000개를 구해 보내주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개당 200원에 살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800원에 판매할 수 있어 생활비를 마련하는데 안성맞춤이란다.

할아버지는 최근 민간 차원의 이산가족교류 주선단체인 남북이산가족협의회에서 통일부 지원을 받아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확인, 편지교환 등 업무를 돕고 있다.

올해 초에는 고향 친구인 김광수 할아버지(가명·78)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안부를 묻길래 사촌동생을 통해 생사확인을 부탁했다.

그러자 지난 7월 사촌동생은 편지를 통해 "광수 가족은 1952년도 가을에 신창비행기 대폭격할 때 직탄을 맞아 온가족이 사망되었습니다"라는 비보를 전했다.

그러면서 "광수가 섭섭하겠지만 전쟁이니까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라며 "조선 사람이 어느 사람치고 피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위로의 말을 보태기도 했다.

이렇게 고향의 동생들과 주고 받은 편지만 400통이다. 1990년대 받은 편지는 팩스 종이인 '감열지'라 색이 바래거나 끝이 바스라지고 있지만 이제는 A4용지로 편지를 출력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해졌다.

할아버지가 편지를 쓴 뒤 일본에 보내면 조총련은 이를 사진으로 찍어 북한 동생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한다.

반대로 북한 동생들이 편지를 써서 일본에 이메일을 보내면 조총련은 편지를 출력해 할아버지에게 전달해준다.

할아버지에게 이 편지들은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는 "돈과 시간이 들지만 동생들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데 감사할 따름"이라며 "이 편지들에는 나와 북한에 있는 동생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뿌듯해 했다.

할아버지는 1998년 첫 이산가족 상봉 접수가 이뤄진 해에 상봉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1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상봉 명단에 들어가질 못했다.

그는 "이산가족 상봉은 꿈도 꾸지 않고 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며 "얼굴을 직접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나마 편지를 교환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다가오는 추석에도 북에 두고온 가족들을 볼 수는 없지만 지난 세월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면서 그리움을 달래야겠지…"라고 말 끝을 흐렸다.

pej86@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