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진로 독촉 사회

신철균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전공을 선택하지 않을 용기' 저자

신철균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계획을 말하지만, 수험생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부 대학의 '정시 경쟁률 10대 1, 3년 연속 최고'와 같은 자극적인 숫자가 언론을 채우는 동안, 합격 통보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진다. 경쟁률 신기록이라는 화려한 수치 뒤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수험생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학생들은 오랫동안 과열된 입시 경쟁 속에서 버티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학생 개개인의 서사, 즉 스스로 탐색하고 축적해 온 경험의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고교학점제와 자유학기제는 학생의 관심과 진로 탐색을 돕겠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현장에서 학생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다르다. "진로를 빨리 정하라", "전공을 일찍 정해 학교생활기록부에 남겨야 뒤처지지 않는다"는 압박이 일상처럼 반복된다. 학생들은 또 다른 '진로의 정답'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사회를 필자는 '진로 독촉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진로독촉사회란, 학생에게 충분히 탐색할 시간과 실패할 권리를 주지 않은 채 조급한 결정을 강요하는 사회다. 필자가 진행한 고등학교 연구에서 한 학생은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뭘 안다고 이렇게 빨리 진로를 정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말은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라, 지금의 교육 현실을 향한 집단적 질문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나라 대학에는 자유전공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대학에 따라 신입생의 5%에서 많게는 30%까지 자유전공으로 선발하고, 일부 대학은 신입생 전원을 자유전공으로 뽑는다. 미국의 하버드대나 펜실베이니아주립대처럼 세계적 대학들 역시 전공 미결정 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천천히 탐색해도 늦지 않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한다. 빠른 전공 선택이 오히려 후회와 번복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유전공 학생을 '준비가 부족한 학생', '뒤처진 선택'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전공을 정하지 않은 채 입학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전공 학생 중 상당수는 입학 초기에 외로움과 불안감을 호소한다. 남들보다 늦게 전공을 정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중함은 뒤처짐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너의 속도로 가도 괜찮다"는 사회적 신호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인간의 삶과 노동을 빠르게 바꾸는 시대다. AI 시대 인간의 고민을 다룬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는 학생에게 목표 의식을 심어주는 것만큼이나, 스스로 진로를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역시 "경직된 사람은 미래를 버티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무엇을 전공하는지가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 시대다.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 새천년관에서 지난해 4월 1일 열린 '제1회 전공탐색 박람회'를 찾은 학부생들이 항공드론 융합전공 부스에서 드론볼 조종 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빠른 전공 결정이 능력의 증거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무엇을 전공하는가'를 넘어서 '어떻게 인생을 디자인하며 탐험해 나갈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기다. '전공을 선택하지 않을 용기'란 무책임함이 아니라 충분히 탐색하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겠다는 성숙한 결단이다.

학생들에게 정답을 강요하지 말자. 진로 결정을 재촉하지 말자. 어른들도 자녀에게 '진로와 전공을 독촉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정해진 울타리에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 비워진 공간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설계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

고교학점제와 자유학기제 같은 교육정책 역시 '조기 진로 결정'을 압박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진로 변경과 유예가 불이익이 되지 않는 제도, 대학과 중등교육이 연계해 탐색의 시간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진로독촉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학생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 그 작은 변화와 용기에서 시작된다.

opini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