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칼럼] '서울대 10조 만들기'를 제안한다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지난해 대한민국은 다사다난이라는 관용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큰 변화를 겪었다. 재작년부터 이어진 계엄과 탄핵의 소용돌이에 오랫동안 휘말렸고, 조기 대선을 거쳐 힘겹게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트럼프가 던진 관세 폭탄에 온 국민이 경제 전문가처럼 나라 걱정으로 노심초사했다. 국가 정보시스템의 심장부인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행정 마비의 위기를 겪었다. 그런 와중에 K컬처는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코스피 지수 사상 최고치 기록과 수출액 역대 최대 7000억 달러 돌파라는 반가운 일도 있었다.

새해에도 대한민국의 앞길에는 불투명한 미래와 큰 도전이 기다린다. 글로벌 정치 경제 환경은 갈수록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 리스크는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엄중하다. 침체한 경제는 시원하게 회복할 기미가 안 보이고, 인공지능(AI)으로 인한 파괴적 변화는 익숙한 모든 질서와 시스템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이제 대한민국이 모방하고 따라갈 선진국 모델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 스스로 길을 열어야 한다.

대전환기, 혁신적 발상의 구심점은 대학

대한민국이 국가 차원의 역량을 결집해 난제를 해결하고 선도적 개척자가 되려면 의지해야 하는 핵심 엔진이 무엇일까. 대학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갈되는 국가 성장 잠재력을 혁신적 발상으로 다시 채울 구심점으로 대학 이외의 현실적 대안을 찾기 어렵다. 특히 AI가 촉발하는 변화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지는 현실에서, 사회 시스템의 바람직한 변화 방향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주역인 청년 세대를 그런 변화에 적합한 능동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대학밖에 없다.

정부가 주요 전략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추진하는 건 대학의 역할에 대한 그런 적극적 인식에 따른 행보다. 모든 자원의 서울·수도권 편중이 국가 성장 잠재력을 고갈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봐서 국가 균형 발전으로 성장 잠재력을 회복하려 하고, 그 핵심 방안으로 각 지역의 구심점이 될 국립대를 선정해 서울대 수준으로 집중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교육부·국가교육위원회·법제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12.12/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서울대 자산은 하버드대의 7% 정도 수준

이재명 대통령이 교육부 업무 보고에서 "손가락이 다섯 개인데 엄지손가락에는 많이 하고 새끼손가락에는 적게 하는 이유가 뭐냐"라며 서울대와 지역 국립대 예산 차등 지원의 공정성을 질문한 것도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다만 한정된 예산의 제약 때문에 공정 추구가 자칫하면 하향평준화로 귀결되지 않나 걱정이 있었는데, 서울대 지원을 깎을 게 아니라 지역 국립대 지원을 서울대만큼 늘리도록 노력하자고 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서울대를 10개 만든다는 목표로 지역 국립대 지원을 늘려도, 정부 지원만으로 그런 이상적 목표가 이뤄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델이라는 서울대 자체가 국내에서나 골목대장이지 세계 주요 대학과 역량 비교가 부끄러운 수준이다.

대학 역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는 재정인데, 2025년 기준으로 서울대 예산은 1.5조 원에 불과하다. 반면 하버드대는 약 9조 원, 베이징대도 9조 원, 도쿄대 2조 6000억 원, 싱가포르국립대는 3조 3000억 원이나 된다. 총자산 차이는 더욱 크다. 하버드대는 76조 원, 싱가포르국립대는 21조 3000억 원, 도쿄대는 13조 2000억 원인데, 서울대는 3조~5조 원 수준이다. 자산만 보면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아니라 서울대 10개 합치기를 해야 할 지경이다.

지역 대학 균형 발전과 서울대 수월성 추구 양립 가능

대학의 발전에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은 필수적인 동력이다. 그러나 한국 현실에서 정부 지원은 대학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일 뿐 세계 주요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국가 성장 잠재력을 확충할 만큼의 자원은 되지 못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로 균형 발전을 추구하는 건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그것만으로 세계 주요 대학과 경쟁할 토대를 만들기에 크게 부족하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대학은 스스로 도약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새해부터 추구할 목표로 '서울대 10조 만들기'를 제안하고 싶다. 정부는 지역 국립대 역량을 서울대만큼 끌어 올리도록 노력하고, 서울대는 과감한 재정 확충으로 세계 주요 대학과 경쟁하는 모델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총자산을 76조 원의 하버드대만큼은 아니어도 도쿄대에 버금가는 10조 원 정도로 최대한 빨리 확충해야 한다. 지금처럼 매년 700억~800억 원 정도 기금을 조성하는 점진적 방식으로는 국내 골목대장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

유홍림 서울대학교 총장이 2024년 4월 3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SNU FUTURE CLUB'출범식에서 서울대학교 미래 비전과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기금 조성과 운영의 혁신적 변화 필요

비상한 목표를 이루려면 비상한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필요한 게 기금 조성과 운영 방식 혁신이다. 기부자의 부동산 위주 기부에 수동적으로 의존할 게 아니라 서울대 교수들의 탁월한 연구 역량과 성과를 바탕으로 연구 기금 중심의 능동적 조성을 추진해야 한다. 다양한 방식의 유연한 기금 운용도 필요하다. 하버드대나 예일대가 적극적인 자산 투자로 기금을 불리고, 스탠퍼드대가 재학생 스타트업에 투자해 성공하는 걸 참조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는 운용은 피해야겠으나, 국민연금도 20%의 수익률을 기록하는데 그보다 못한 운용 방식이라면 재고함이 마땅하다.

기금 조성과 운용의 혁신적 변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서울대가 정부의 국립대 균등 지원과 '서울대 10개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만큼 정부도 변화의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 서울대가 형식적 법인화를 넘어 기금 운용의 명실상부한 자율성을 갖고 재정 독립을 이루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서울대 10조 만들기'가 성공한다면, 이는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함께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쌓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opini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