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범행 사무실에 컴퓨터 깔아준 것만으론 사기 방조 아냐"

"컴퓨터 설치 외 범행 기여 없고 추가 수익도 없어"

(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지인의 부탁을 받고 불법 사기 범행이 이뤄지는 사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해 주고 사무실 이전 작업을 도와줬더라도, 구체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정황이 밝혀진 것이 없다면 사기 방조 혐의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사기 방조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김 모 씨(29)의 상고를 받아들여 사건을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고등법원에 환송했다.

김 씨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A 씨로부터 컴퓨터 설치 등을 부탁받고 2024년 11월부터 2025년 5월까지 A 씨가 운영하는 경기 시흥 호재 콜센터 사무실에 컴퓨터 등 집기를 설치하고 사무실 이전 작업을 해줬다.

그러나 A 씨가 운영하던 곳은 콜센터 사무실로 위장한 불법 사기 범행 장소였다. A 씨 등은 불특정 다수에게 전화해 투자리딩비용을 환불해 주겠다고 접근한 뒤 코스닥 상장 예정인 공모주를 싸게 살 수 있다고 속여 피해자 11명으로부터 총 4억2592만 원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해 준 김 씨도 범죄단체 가입 및 활동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김 씨에게 사기 방조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552만 원을 추징했다.

김 씨는 "A 씨 요청으로 단순히 컴퓨터를 설치·이전하는 통상적 업무를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며 "A 씨가 사기 범행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막연히 불법적 일을 할 것이라고 짐작했다는 것만으로 사기 방조 고의가 인정돼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 씨가 A 씨로부터 사무실 이전 과정에서 컴퓨터를 처분하고 SSD 카드를 초기화하라고 지시를 받은 점, 둘이 텔레그램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점, 김 씨가 컴퓨터 등을 설치한 사무실 창문이 암막 시트지로 가려져 있었고 사무실 철거 과정에서 사무실 안 보드판에 '비상장주식', '순위', '수익률'과 같은 단어가 적혀있던 것을 확인 한 점을 근거로 사기 방조 혐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A 씨의 부탁을 받아 컴퓨터를 설치하는 등 행위를 하고 통상적 수준의 설치 대금을 수령했다"며 "김 씨가 컴퓨터 설치 외 A 씨 범행에 기여한 바 없고, 설치 대금 외 어떠한 명목으로도 범죄 수익을 추가로 배분받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김 씨가 A 씨 외 사기 범행 조직원들과 연락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이 범죄단체 조직 형태가 어떤지,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지, 수익금 배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에 관해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씨가 설치한 컴퓨터를 이용한 A 씨 사업의 적법성에 일부 의심이 드는 사정이 있다고 해 곧바로 김 씨에게 방조의 고의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특히 개인정보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텔레그램은 범죄행위와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고, 개인정보가 담긴 저장장치를 복구할 수 없게 폐기하는 행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며 방조의 고의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또 2심이 김 씨가 재판에서 경찰 피의자신문조서 내용을 부인했는데도, 조서에 나온 김 씨 진술을 증거로 삼아 고의를 인정한 것은 잘못됐다고 덧붙였다.

ho86@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