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당시 조희대 대법원장은 '유능'했나 '무능'했나[이승환의 로키]

편집자주 ...영어 단어 로키(lowkey)는 '사실은' '은근히' '조용히' 등을 뜻합니다. 최근 영미권 MZ세대들 사이에선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은근히 표현할 때' 쓰입니다. 솔직하되 절제된 글을 쓰겠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2025 대한민국 법원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25.9.12/뉴스1 ⓒ News1 김영운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여파는 가시지 않았다. 기자는 하루아침에 경찰 1인자에서 내란 사건 공범으로 전락한 조지호 경찰청장의 모습이 아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조 청장은 '유능하다'고 평가받던 카리스마형 리더였다. 조직 장악력과 업무 추진력이 장점이었다. 그런 그가 윤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국회 봉쇄 등을 지시하며 비상계엄에 연루된 사실이 여전히 잘 믿기지 않는다.

경찰관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는다. 최근 만난 A 경무관(경찰 서열 네 번째 계급)은 비상계엄 3시간 전쯤 열린 안가 회동을 언급하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소재의 대통령안전가옥(안가)에서 진행된 회동에는 윤 전 대통령과 조 청장, 김봉식 서울경찰청장,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참석했다.

"조 청장은 당시 안가에서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장악기관 10여 곳(국회·MBC·여론조사 꽃 등)이 적힌 A4 한 장 분량의 문서를 받았습니다. 그 후 조 청장은 어떻게 했죠? 그 사실을 본인과 김 서울청장만 알고 있다가 계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경찰을 대표하는 청장이라면 계엄 선포 전 참모진과 회의를 열어 어떻게 대응할지, 지시를 이행할지 말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A 경무관)

A 경무관은 그러면서 사무관 파견 요청을 거부한 '대법원'을 언급했다. 지난해 12월 3일 밤 10시 25분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부가 사법부에 법원 5급 사무관 파견을 요청한 사례이다. 대법원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희대 대법원장(68·사법연수원 13기)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자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알림으로 비상계엄을 최초 인지했으나 그때만 해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 뉴스 등으로 비상계엄이 사실임을 확인한 후 야심한 밤 대법원으로 출근해 법원행정처 간부들과 회의에 돌입했다. 이후 조 원장은 '사무관 파견 요청'과 관련해 '비상계엄은 위헌 소지가 있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비상계엄 사태에는 검찰과 경찰, 소방청 등 주요 기관이 관련돼 있다. 경찰 서열 1위와 2위인 조 청장과 김봉식 서울청장은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재판받고 있다.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은 계엄 직후 주재한 회의에서 합동수사본부에 검사 파견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의혹으로 특검의 수사를 받고 있다.

심우정 전 검찰총장은 법원이 지난 3월 윤 전 대통령의 구속을 취소한 것과 관련해 즉시항고를 하지 않아 고발됐고 특검의 수사 대상에도 올랐다. 허석곤 소방청장은 '참고인 신분'이긴 하지만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의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 의혹과 관련해 특검 조사를 받았다.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가운데 내란 사태에서 법적으로 자유로운 곳은 그나마 사법부다. 대법원이 '사무관 파견' 요청을 거부한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런 사법부도 현 정부 들어 개혁의 대상이 됐다. 정부와 여당은 그 개혁의 일환으로 현재 14명인 대법관을 26명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법원이라고 완전무결하지 않고 대법원장이라고 공명정대한 판단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의 필요성이 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비상계엄 사태만 기준으로 두고 보면, 수장이 법과 원칙과 국민 상식에 부합하는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대법원장 역시 임명권자는 대통령이다. 조 원장이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따른 지시를 불이행하는 데 적잖은 부담이 따랐을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의 배경과 경위를 추적한 책 '두 얼굴의 법원'(권석천 저서)에는 인상 깊은 대목이 있다. '유능해야 할 때 유능해야 하는데, 무능해야 할 때 유능할 때가 많다'(76쪽)는 내용이다.

부당한 지시는 '무능하다'는 평을 감수하고서라도 따르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조지호 경찰청장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까. 조 청장을 비롯한 권력기관 수장이 대거 연루된 계엄 사태는 우리 사회 곳곳의 의사결정권자에게 한가지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무능해야 하는데, 유능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느냐'라고.

mrl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