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현금 부자만 웃는 청약 시장…헨리의 자리는 없다

7일 오후 서울 송파구 래미안갤러리에서 시민들이 반포 래미안 트리니원 견본주택을 보고 있다.  2025.11.7/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7일 오후 서울 송파구 래미안갤러리에서 시민들이 반포 래미안 트리니원 견본주택을 보고 있다. 2025.11.7/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서울=뉴스1) 윤주현 기자

"부자 되는 게 제일 쉬워요."

30억 원대 '로또 청약'으로 불리는 서초구 '래미안 트리니원' 견본주택에서 만난 한 예비 청약자가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과거 여러 부동산 투자로 부를 쌓았다고 밝힌 그는 청약 당첨 가능성도 가볍게 여기는 듯했다.

견본주택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보니, 단기간에 20억 원이 넘는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단지임에도 내부는 '현금 여력' 있는 이들로 붐볐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시세차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청약 제도가 추구하던 취지가 어디까지 훼손됐을까' 하는 의문은 곧 확신이 됐다.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해 주택 시장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청약 제도의 취지는 사라진지 오래다. 까다로운 소득 기준과 달리 턱없이 높은 분양가는 일은 하지 않더라도 자산을 보유한 이들에게만 유리한 구조다. 사실상 '현금 부자'에게 수십억 원의 로또 기회가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반면 우리 사회의 '헨리'(HENRY)들은 갈수록 길을 잃고 있다. 헨리는 'High Earning, Not Rich Yet', 즉 높은 연봉을 받지만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 청년층과 신혼부부, 젊은 직장인 등을 말한다. 이들은 치솟는 집값과 강화된 대출 규제로 청약 당첨은커녕 지원 요건조차 맞추기 쉽지 않다. 단지 소득이 높은 사람들의 푸념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면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최소한의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대출 규제 강화는 그나마 남아 있던 '주거 사다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대출 한도가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 서울 아파트는 '노력으로 닿을 수 있는 자산'이 아닌, 대규모 현금을 가진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이 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돈 모아서 집값 떨어지면 사면 된다"는 말이 왜 시민들에게 분노를 샀는지는 자명하다.

정부의 기대와 달리 서울·수도권 집값은 여전히 오르고 있다. 금리 인하 기조와 공급 부족 우려까지 더해지며 내년 시장이 다시 과열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평범한 '헨리'들은 여전히 좁은 전·월세방에서 미래를 그리며 살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부가 아니라 '노력하면 집을 살 수 있다'는 최소한의 공정성이다. 지금이라도 실수요자가 제도 안에서 기회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정책적 개선이 이어져야 한다.

gerrad@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