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대통령, 北과 공존 '단계적 비핵화론'…'한미 공조' 북 대화 끌어내야

유엔총회서 'E·N·D 이니셔티브' 선언…"흡수통일 추구 않는다" 재확인
'중단-축소-폐기' 단계적 비핵화 제시…北 핵보유 현실 인식, 실용적 접근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서울·뉴욕=뉴스1) 한재준 심언기 한병찬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새 정부의 한반도 정책 구상을 밝혔다. 남북 간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와 비핵화(Denuclearization) 3원칙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E·N·D 이니셔티브'로 단계적 비핵화를 제시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북미 대화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비핵화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역할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국제 무대에서 공식 천명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80차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에서 일곱번째 기조연설자로 나서 "대한민국은 'E·N·D 이니셔티브’로 한반도의 냉전을 끝내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기 위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가장 확실한 평화는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라며 "교류(E), 관계 정상화(N), 비핵화(D), 즉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대화로 한반도에서의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 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尹 흡수통일론에서 '공존'으로 복귀…文정부 정책 이어받아

이 대통령은 북한 체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는 상대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 행위를 할 뜻이 없다"고 했다.

이날 이 대통령의 연설문 중 '통일'이란 단어는 이 대목에서 유일하게 나왔다. 북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해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한반도 정책과 배치되는 것으로 우선 북한 체제에 대한 존중으로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뜻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한반도 정책과 맞닿아 있다. 문 전 대통령 또한 지난 2017년 첫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라며 "어떤 형태의 흡수 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완전한 비핵화보다 '단계적 비핵화'…북미대화 지원 의지

이 대통령은 북핵 문제도 현실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진 않고 있지만 '핵 보유' 자체를 부정하고서는 비핵화에 도달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단계적 접근 방안을 공식화 했다.

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비핵화는 엄중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렵다는 냉철한 인식의 기초 위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됐다"며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중단'부터 시작해, '축소'의 과정을 거쳐 '폐기'에 도달하는 실용적, 단계적 해법에 우리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기 초 '베를린 선언'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를 제시한 문 전 대통령과 접근 방식을 달리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군축 협상부터 진행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순 없지만 우리도, 미국도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은 인식하고 있다"라며 "일단 (핵무기를) 더 만들지 못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비핵화로 가는 코스가 시작된다. 이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단계적 비핵화 구상을 국제무대에서 공식화 한 건 북미 대화를 촉진하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에 대한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하며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고, 백악관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총비서 간의 대화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밝혔다.

북핵 문제 해결의 단초를 어떤 방식으로 여느냐가 북미 대화의 선결 조건인 만큼 '북핵 고도화 중단'을 첫 단계로 제시하며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는 남북은 물론 국제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며 "남북 관계 발전을 추구하면서 북미 사이를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정상화 노력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이 비핵화라는 표현 자체를 거부하고 있고, 협상을 하더라도 핵 군축 협상을 하자는 게 북한이 꾸준히 해 온 얘기"라며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한다면 어떤 형태의 비핵화 정책을 할지에 대해 한미가 적극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hanantwa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