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공원의 2030 외침에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보다[전문가 칼럼]
양정호 성균관대 교수(전 국회미래연구원 이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난 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목격한 참상은 과연 이 나라가 세계가 부러워하던 IT 강국이자 선진 민주 국가가 맞는지 눈을 의심케 했다. 대낮에 투표용지가 모자라 주권자의 발길을 돌려세우고, 개표 숫자가 멋대로 뒤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선거 부실이 전국에서 속출했다.
과거의 역사가 겹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투표 결과가 잘못 기입돼 1000여 명의 소중한 표가 허공으로 날아가고 후보 간 득표수가 정반대로 뒤바뀐 이번 개표 오류는, 권력이 유권자의 표를 마음대로 주무르려 했던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음습한 기억을 소환할 만하다.
또한 국민이 피와 눈물로 직선제를 쟁취해 내며 '내 손으로 뽑는 공정한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기본을 세웠던 1987년 '6·10 항쟁'의 정신을 정면으로 모독한 처사이기도 하다. 87년의 선배들이 목숨 바쳐 세워 올린 절차적 정당성을, 현 정부와 선거관리위원회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면에서 철저히 방전시켜 버렸다.
더욱 분통이 터지는 것은 사태를 대하는 선관위의 뻔뻔하고 안이한 태도다. 선관위는 당초 전국 50개 투표소에서 4700여 장의 용지가 부족했다고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실제 부족했던 곳은 91곳, 용지는 7194장에 달한다고 말을 바꿨다. 앞으로 더 조사가 진행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더 알려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투표가 중단된 곳도 22곳에서 26곳으로 늘어났다. 송파의 한 투표소에서는 고작 용지 7장이 모자라 무려 105분 동안 투표가 중단됐고, 잠실의 한 투표소에서는 436장이 부족해 세 차례에 걸쳐 1시간 넘게 투표가 멈추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지경인데도 선관위의 해명은 실소를 자아낸다. "과거에도 용지가 부족하면 추가로 공급해 왔다"며 추가 송부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본질을 흐리더니 "실제 추가 송부가 원활하지 못해 투표가 중단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했다.
인쇄 하한선 산정에 실패하고 현장 잔여 수량조차 파악하지 못한 무능, "인력이 부족해 위기 대응이 미흡했다"는 구차한 변명은 이 조직이 과연 헌법기관이 맞는지 의구심을 들게 한다.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이미 바닥으로 추락한 선거 신뢰성을 무슨 수로 회복하겠는가. 계산조차 틀리고 투표용지조차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와 선관위를 보며 국민들은 깊은 멸시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가장 어두운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정부의 무능과 기성 정치권의 진영 싸움으로 심정지 상태에 빠진 민주주의의 텃밭을 다시 깨운 것은 다름 아닌 2030 세대의 순수한 분노였다.
최근 올림픽공원 광장을 가득 메운 청년들의 모습을 봤다. 정파적 이익이나 정당의 사주에 오염되지 않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과 원칙을 요구하는 청년들이었다. 기성세대가 선관위의 무능을 정쟁의 도구로 소비하며 삿대질만 할 때 이들 2030 세대는 "우리의 신성한 한 표를 돌려내라", "부실 선거를 규명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며 광장으로 나섰다.
이들이 외치는 '재선거'는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부실과 왜곡으로 점철된 선거 결과는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훼손된 민주주의의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권자로서의 당연하고도 엄중한 권리 주장이다.
올림픽공원을 가득 채운 청년들의 맑은 눈망울과 당당한 목소리에서 필자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다. 정부의 무능으로 시스템은 붕괴했을지언정 우리 청년들의 가슴속에 흐르는 민주주의의 DNA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청년들이 재선거를 외치며 광장을 지키는 한, 이 나라 민주주의의 뿌리는 절대 뽑히지 않는다. 정부와 선관위는 이 준엄한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청년들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다면, 역사가 증명해 온 민심의 무서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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