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정치권, '대화록' 정쟁에 갇힌지 꼬박 1년

정치권 내부서도 "이젠 그만" 자성
말만 바꾸며 진흙탕 싸움…'민생' 외면하며 '대화록 블랙홀' 로

지난 7월2일 국회 본회의에서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녹음기록물 등 국가기록원 보관 자료 제출의 건이 재석 276인, 찬성 257인, 반대 17인, 기권 2인으로 가결되고 있다. © News1

(서울=뉴스1) 김영신 기자 = 정치권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회의록)을 둘러싼 정쟁에서 빠져나오긴 커녕 1년째 정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정쟁이 잠시 잦아들다가도 여야할 것 없이 논란을 또 다시 촉발시키며 '네탓 공방'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정기국회 또한 대화록 정쟁에 갇힐 위기에 놓여있다.

정치권이 해묵은 정쟁에 빠져 법안처리, 예·결산 심의 등 민생을 챙기는 본업은 뒤로하고 있다는 지적이 불가피하다.

하나의 정쟁이 1년 이상 지속되면서 우리 정치권의 문제해결 능력이 부재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盧, NLL 포기" 정문헌 폭탄발언, 그후 1년

대화록 정쟁은 지난해 10월8일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며 시작했다.

18대 대통령 선거는 정 의원의 폭탄발언으로 격랑에 휩싸인 끝에 박근혜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민주당으로부터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검찰에 고발당한 정 의원이 지난 2월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대화록 정쟁은 잠시 잦아들었다.

그러나 지난 6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여부를 두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며 대화록 정쟁은 수면 위로 재차 떠올랐다.

민주당 소속 박영선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이 6월17일 "지난해 NLL 포기발언 논란은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짜놓은 시나리오였다"고 주장하자 새누리당은 정보위 소속 의원들의 '국정원본 발췌록' 단독열람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를 확인했다"고 맞불을 놨다.

정국이 혼돈에 빠지자 여야는 강조점은 달랐지만 대화록 원본 열람에 일단 합의했다. 그 와중에 6월24일 국정원은 '명예회복'을 이유로 국정원본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다.

예상치 못한 국정원의 돌발행동이 있자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요구하는 국정원 국정조사를 수용했다. 한편 국정원본 대화록 전문이 공개된 후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60%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NLL 포기가 아니었다"고 응답했다.

민주당은 여론을 등에 업고 대선 당시 권영세 현 주중대사와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에게 대화록을 사전에 '불법유출'됐다며 반격을 취했다.

여야는 이처럼 엎치락뒤치락 대화록 정쟁을 이어가다 결국 대화록을 공개키로 했다. 대통령기록물인 대화록 열람을 위해선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한데, 7월2일 표결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대화록 원본과 부속자료 열람의 건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야는 7월15일부터 국가기록원에서 대화록 검색 작업에 착수했다. 대화록 원문이 공개되면 정쟁이 끝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대화록은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7월22일 여야는 "국가기록원에 대화록이 없다"는 결론을 냈다. 이로인해 공방 대상은 'NLL 포기발언 진위여부'에서 '사초실종'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새누리당은 "노 전 대통령과 친노세력이 굴종회담을 덮기위해 대화록을 없앴다"며 친노세력과 문재인 의원을 정조준했다. 반면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관리부실"이라며 NLL 포기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서 부속자료를 열람하자고 맞섰다.

사태가 '사초게이트'로까지 비화될 조짐이 보이자 여야 일각에서 공히 정쟁을 중단하고 출구를 찾자는 의견이 터져나왔다.

NLL 대화록 열람위원인 새누리당 황진하,조명철 의원과 민주당 전해철, 박남춘 의원이 지난 7월19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 경기도 성남 국가기록원을 재방문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News1

검찰의 사초실종 수사가 시작되자 7월26일 새누리당은 "NLL 정쟁 중단"(최경환 원내대표), 민주당은 "NLL 논란 영구종식"(전병헌 원내대표)을 선언했다. 물론 각자의 속내는 달랐지만 일단 정쟁을 불식하자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새누리당에선 '국정원 음원파일 공개', 민주당에선 '부속자료 열람 및 특별검사 수사'를 요구하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다만 국정원 국정조사를 문제삼아 민주당이 8월1일을 기점으로 서울광장 장외투쟁을 선언하면서 대화록 정쟁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치권은 그러나 지난 10월2일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로 또다시 쑥대밭이 됐다. 검찰은 "대화록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이관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대화록은 국가기록원이 아닌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가기 위해 복제한 '봉하 이지원'에서 발견됐다. 검찰은 또 '봉하 이지원'에서 회의록 초안 삭제 흔적 및 수정 최종본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즉각 "노 전 대통령이 '굴종회담'을 덮기 위해 초안을 삭제하고, 대화록을 고의로 빼돌렸다"고 주장하며 '사초폐기론'을 다시 꺼내 친노세력을 조준했다.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대화록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검찰수사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난맥상을 덮기위한 '물타기'"라고 맞서고 있다.

민주당 또한 지난 대선 당시 대화록이 새누리당에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새누리당에 맞불을 놨다.

◇'민생' 정기국회도 대화록 블랙홀 속으로

민주당은 지난달 23일 "조건없는 등원"을 선언하며 장외투쟁 54일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민주당이 국정감사와 예결산 심의 등에 적극 나서는 '원내투쟁 강화'를 택하며 국회는 어렵사리 정상화했다.

민주당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 사퇴논란,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 및 기초연금 공약 후퇴 논란 등으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공세 고삐를 조였다.

새누리당은 정기국회에서 경제살리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과제를 내세우며 민주당이 법안 처리에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검찰 중간수사 발표가 나오며 정국이 급속히 대화록 정쟁으로 또 다시 빠져들며 어렵사리 정상화한 정기국회에 빨간불이 켜졌다.

결과적으로 1년 간 정치권은 'NLL 포기', '대화록 공개', '사초실종', '사초폐기' 등 키워드만 바꿔가며 정쟁을 지속한 것도 모자라 각종 시급한 민생현안 처리를 해야하는 정기국회마저 공염불에 그치게 할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더욱이 현재 새누리당에선 국정원 음원파일 공개, 민주당에선 부속자료 선열람 주장을 반복하고 있어 수개월 전과 같은 패턴의 공방을 벌일 태세다.

말로는 일제히 '민생'을 외치면서도 여야는 정쟁의 종지부를 찍을 생각은 않고, 이슈 부풀리기를 반복하는 구태를 재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는 6일 뉴스1과 전화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여부는 보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른 문제"라며 "판정을 내기 어려운 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악용하는 건 정치에 대한 불신을 더 키울 뿐 여야 모두에게 득이 되는 문제도 아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대화록 문제는 더 이상 정치권이 나서서 싸울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며 "기술적으로 사초가 왜 이지원에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 않았는지, 학술적으로 대화록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졌는지 등을 전문가와 학계가 짚을 수 있도록 정치권은 소모적 정쟁을 중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정치권이 대화록 정쟁으로 국민 시선을 돌려놓는 한편 예산심의 과정에선 '자기 이속챙기기' 야합을 할 가능성이 크다"며 "여야가 안된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예결산, 복지정책 등을 다룰 정기국회를 위해서라도 대화록 정쟁 중단 제시하는 조정적 리더십을 발휘할 때"라고 제안했다.

eriwhat@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