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치료제 '대수술'해 보건보험제 도입한 북한[정창현의 북한읽기]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편집자주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의 평양종합병원.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지난해 10월 북한 보건 분야의 숙원사업이었던 평양종합병원 준공식이 착공 5년 7개월 만에 열렸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올해 들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의료진들이 새로 구비한 의료기기들을 운영해 보고, 새로운 의료체계에 적용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북한이 '국가적 성과'로 선전하는 평양종합병원의 운영 방식은 변화한 북한의 의료체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평양종합병원을 찾은 평양 시민들은 낯선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에 없던 병원 접수 창구에 접수비, 진찰비 등 진료 항목별 비용과 주로 처방되는 약값이 적혀 있고, 진료를 받은 환자들이 돈을 지불하는 광경이다.

올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중국의 한 기업인은 "평양 방문 중 평양종합병원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진료를 받은 환자들이 진료비를 내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라며 "진료가 모두 끝난 뒤 한 번에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진료 항목마다 비용을 먼저 지불한 뒤 검사를 받는 방식이 중국의 병원 운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전했다.

물론 진료비 납부가 평양종합병원이 개원하면서 처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북한의 병원 이름에서 '인민'이란 표현이 사라진 뒤부터 진료비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2021년 개최한 노동당 제8차 대회 이후 도 인민병원을 도 종합병원으로, 시 인민병원을 시 병원으로, 군 인민병원을 군 병원으로 변경했고, 최고 중앙병원인 평양종합병원에서도 '인민'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사회주의 체제 성립 이래 오랫동안 유지돼 온 병원 명칭에서 '인민'이 삭제된 것은 무상치료 원칙의 중대한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2024년 이후 북한의 언론매체에서 '무상치료제'를 언급한 기사가 사라졌다.

또한 국가가 운영하는 약국에서도 의약품이 무상이 아니라 유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비상방역 기간 중이던 2022년 5월에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지시로 설치되기 시작한 국영약국인 '표준약국'은 2024년에 이르러 모든 시·군에 설치됐다. 라선시에 있는 약국에 게시된 가격표를 보면 국내 생산 약품과 수입 약품 가격을 나눠서 표기하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 평양종합병원의 내부.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이러한 병원과 약국의 운영방식 변화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공식 확인됐다. 연설에서 김 총비서는 "전국적 범위로 확대하고 있는 보건보험기금에 의한 의료보장제를 편향 없이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통해 북한이 시범적으로 '보건보험기금에 의한 의료보장제'를 도입했고, 이를 전국적으로 정착시키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보건보험기금'은 국가 예산을 기반으로 운영된 기존의 무상치료제와 달리 피보험자와 기업소 등으로부터 징수한 보험료를 기반으로 의료비의 일부를 보장해 주는 사회보험의 일종으로 보인다.

기관이나 기업소에 소속된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보건보험 가입을 의무화해 임금에서 보험료를 공제하고, 의료보험에 가입된 경우 국가에서 정한 가격으로 병원 치료와 약품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북한은 보건보험기금과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김일성김정일기금, 교육후원기금, 탄부후원기금, 민족유산보호기금 등을 운영해 부족한 재정을 보완해 왔다.

무상치료제에서 '보건보험기금'에 기초한 유상치료제로의 변화는 올해 개정된 헌법 조문에서도 확인된다. 개정된 헌법 제49조의 보건의료 조항은 "국가는 사회주의 보건제도를 공고발전시키며 의료봉사의 질을 개선하고 보건부문의 물질기술적 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바뀌어 기존의 '전반적 무상치료제'라는 문구가 삭제됐다.

무상치료제 대신 '의료봉사의 질 개선'과 '보건부문의 물질기술적 토대 강화'로 정책을 바꿔 국가의 부담을 줄이며 의료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도·시·군 차원에서 진행되던 병원현대화와 의료기반시설 건설사업이 중앙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병원 건설사업으로 변화됐다. 출발점은 2024년 1월 김 총비서가 최고인민회의에서 한 시정연설이었다. 이 연설을 통해 김 총비서는 향후 10년간 매해 20개 시·군에 현대적인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하는 '지방발전 20×10 정책'을 내놓았고, 몇 달 후 이와 연계해 현대적인 지방 보건시설을 함께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2025년부터는 '보건혁명'을 선포하고 지방병원들의 온전한 의료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할 수 있도록 시범적으로 3개 지방병원(강동군병원, 구성시병원, 룡강군병원)을 건설한 후 이를 본보기로 올해부터 매해 20개 시·군 병원의 동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해 7월 시찰한 함경남도 낙원군의 지방발전정책 대상 건설장.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북한이 선포한 '보건혁명'은 병원 시설 건설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보건의료 체계 전반에 대한 개혁을 예고하고 있다. 김 총비서는 지난해 평양종합병원 준공식 연설에서 보건의료부문의 동시병행 전략을 언급하며, 중앙급 병원에서부터 하부 보건시설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의료 전달 체계와 의료인력 양성 체계, 의학 연구 사업 체계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동시에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는 중앙과 지방, 3차 및 1·2차 의료기관 간 연계 구조를 재설계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무상치료제 폐지와 '보건혁명'이 추진되면서 북한의 보건의료는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북한 최고의 중앙병원인 평양종합병원에서 치료비와 약값을 받는 풍경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

25년 전인 2001년 10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경제생활에서 공짜가 많은데 이런 것도 정리하여야 합니다. 공짜가 많으면 노동에 대한 자극과 통제가 약화되며 사회주의분배원칙을 옳게 실시할 수 없습니다. 무상공급이요, 국가보상이요 또 무슨 혜택이요 하는 것들을 다 검토하여 보고 없앨 것은 없애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지시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무료의무교육제, 무상치료제, 사회보험제와 정휴양제, 영예군인우대제 등은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사회적 시책"으로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고 표방했다. 그러나 이제 유명무실해진 무상치료제를 현실적 조건에 맞게 조정되면서 큰 변화를 물결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일단 북한의 중상류층은 이러한 조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엔 진료 자체는 무료라고 해도 병원에 의약품과 의료 장비가 부족했고, 주민들이 직접 치료에 필요한 약품을 장마당이나 개인 약국에서 직접 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시장에서 돈을 번 주민들조차도 제대로 된 의료봉사를 받지 못해 중국에 나가 치료를 받거나 중국의 지인들에게 의약품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 돈이 있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높은 수준의 치료를 받을 수 있어 최근의 변화를 대체로 환영하고 있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중국 기업인들의 공통된 평가다. 전국적으로 '표준약국'에 안정적으로 의약품이 공급되고, 군 단위 병원까지 현대화된다면 북한 주민의 의료 접근성은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보건의료제도의 개혁과 의료시설의 확대는 북한 보건의료체계의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북한이 의료장비·의약품·백신·의학 교육 등에서 자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러시아와 중국, 일부 유럽 국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보건 분야의 남북 협력에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새로 건설된 의료시설의 정상적인 운영과 생활 형편에 따른 주민의 '의료 접근성 격차' 해소가 북한 당국의 숙제로 남아 있다.

2023년 11월 평양제약공장이 새로 준공됐을 때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평양제약공장 현대화는 이제부터입니다"라고 보도했다. 이 평가처럼 북한의 '보건혁명'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다.

opini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