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이 된 탈북민…"정착은 오묘한 단어"[경계를 건넌 사람들]
한국살이 10년차, 은행원은 4년차…통장 개설 업무부터 차근히 배워
'감사'로 시작했던 대학생 봉사…"다양한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탈북민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 중 하나는 '정착'이다. 하지만 이강 씨(36)는 이 단어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인터뷰 당일, 회의시간이 길어져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서둘러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모습은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서울 은평구의 한 은행에서 기업대출과 해외송금 업무를 맡고 있는 그는 결혼 9년 차 가장이자, 최근 청약에 당첨돼 새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는 예비 집주인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정착한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했다.
"정착이라는 게 참 오묘한 단어 같아요.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일 텐데, 저한테는 아직 답이 없는 단어예요."
그가 쉽게 정착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 때문이다. 평양에는 어머니와 친척, 친구들이 있다. 현재는 연락도 닿지 않는다. 이 씨에게 탈북은 새로운 삶의 시작인 동시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이었다.
"경계를 건너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제가 원래 있던 울타리에서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요. 어머니의 사랑도 있고 친구들과의 우정도 있고, 제 소중한 것들은 다 거기에 있는데 저만 여기 있는 거죠."
그는 자신을 '우주선 밖에 떠 있는 우주인'에 비유했다. 우주인이 우주선 밖으로 나갈 때 안전을 위해 선체와 연결하는 그 줄. 이 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과 연결된 '마음의 끈' 같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 온 지 10년. 그는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을 꾸렸고 내 집 마련의 꿈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착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씨는 농담처럼 말했다. "은행원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중도금을 대출받고 나서 그런 생각은 했어요. '빚이 생기면 정착한 거 아닌가?'" 아주 잠시 웃음을 터뜨린 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정착했을지 몰라도 마음까지 정착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이 씨는 대안교육기관 '반석학교'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27살에 결혼했다. 지금은 아내도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게 됐지만, 당시에는 직업을 구하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조급함도 있었다.
막연하게 데이터 분석 관련 직무로 취업을 준비하겠다고 생각하다가 우연히 본 은행원 모집 공고가 그의 삶을 바꿨다.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시험은 당시 준비를 같이한 탈북민 지인들과 열심히 공부했다. 이 씨의 기억에 따르면 해당 공고에 탈북민 30여 명이 지원해 이 씨를 포함해 4명이 최종 합격했다.
그는 지난 2021년 중앙대 응용통계학과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두고 합격 통보를 받아 이듬해부터 연수를 시작했다. 신입사원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개인 창구를 배치받아 고객들의 통장 개설, ATM기 현금 정리 등 간단한 업무를 배웠다.
그렇게 보낸 3개월은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점점 그 괴리가 커졌어요. 창구 앞에 앉아서 통장 만들어주는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죠. 나름 전공이라는 게 있는데 비슷한 일을 할 줄 알았어요. 근데 뭐 어쩌겠어요? 사실 다른 대안은 없었어요."
그렇게 4년 넘게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침 8시 출근을 하고, 오후 4시에 은행 문은 닫히지만 야근을 할 때도 적지 않다고 했다. 퇴근 후엔 딸이 좋아하는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것이 하루의 '루틴'이다.
그러나 정작 이 씨가 꼽는 가장 힘들었던 일은 취업 준비도, 회사 적응도 아니었다. 중국에서 학대를 겪으며 자란 딸을 가족으로 품는 과정이었다.
결혼 후 그는 아내와 함께 중국의 한 시설에 있던 여자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당시 아이는 9살이었다. 중국어만 사용하던 아이는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 놓였고, 어린 시절 겪은 상처도 깊었다. 이 씨는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며 딸이 겪었을 트라우마를 짐작했다.
딸이 사춘기를 겪으며 "왜 나를 데려왔느냐", "중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화를 낼 때는 이 씨도 우울증이 올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씨는 딸을 데려온 선택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인생, 생명 하나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최근에는 딸의 선택을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전에는 책임감 때문에 애한테 너무 집착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네 인생이니까 성인이 되면 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결국 그 아이도 자기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이 씨는 아이를 품기로 한 결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의 엄마는 북한에서도 고아였고 그래서 중국에 팔려 갔다고 들었어요. 엄마의 삶이 딸에게까지 대물림될 것 같았고 그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가족이 되는 건 시간이 걸릴 뿐 당연한 일이라는 게 이 씨의 생각이다. 그가 부모가 된 이후 가장 깊은 성찰을 안겨준 존재가 딸이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그는 대안학교를 같이 졸업한 탈북 청년들과 함께 봉사단을 직접 만들었다. 산불 피해 복구 현장, 독거노인 방문, 다문화가정 지원 등 경제적인 후원은 어려워도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3년 넘게 이어진 활동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한국 사회가 너무 고마웠어요. 한국 국민도 고맙고, 정부도 고마웠고요. 받은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에 환원을 좀 해야겠다 그런 단순한 생각에 봉사를 했죠."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는 의욕이 넘쳤다"라고 웃었다.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도 조금은 밝아졌다. 한국 생활 10년을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묻자 그는 두 사람을 이야기했다. 한 명은 자신을 한국으로 이끌어준 사업가였고, 다른 한 명은 이름도 모르는 택시기사였다.
탈북 후 중국 칭다오에 머물던 시절 그는 한 한국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한국행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이 사업가는 이 씨를 한국 대사관과 연결해 주고 한 달 넘게 숙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입국 직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돈이 필요하다며 이 씨의 정착지원금 일부를 송금받은 뒤 연락을 끊은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었는지 사기꾼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도움과 가장 큰 충격을 준 잊지 못할 사람이라고 이 씨는 말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이지만 그는 그마저도 원망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이상한 사람도 만났지만 결국은 사람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면서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 만난 한 택시기사는 그 사업가와는 전혀 다른 기억의 사람으로 남아 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택시비를 안 받더라고요. '잘 왔다', '잘 살아 보라'고 말해주는데 그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나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따뜻함은 오랫동안 남았다. 그는 "그 기사님 덕분에 한국 사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게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선의와 배신, 따뜻함과 실망이 모두 뒤섞인 기억들이지만 그는 결국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도움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의외로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건강이요. 10년 정도 살아 보니까 결국 남는 건 체력인 것 같더라고요. 건강해야 가족도 지키고, 살아갈 힘도 생기니까요."
정착을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이유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놓지 못한 마음속 끈이었다.
※뉴스1·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oumj@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편집자주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삶에 정착한 이들. 정착 이후에도 크고 작은 경계를 극복해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문화와 관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삶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몰랐고, 알아야 할 삶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