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냉각기'에 남북 교류 어떻게 성사됐나…北 '리호남' 역할에 주목

'흑금성 사건'부터 남북 정상회담까지 두루 등장한 '미스터리' 사업가
北 최고위층 지시 받아 南 '진의' 파악 나섰나…"최근 남측 단체들에 접촉"

파주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DMZ)의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와 남한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는 모습. 2021.9.27 ⓒ 뉴스1 이승배 기자

(서울=뉴스1) 임여익 기자 =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으로 남북관계가 역대급으로 냉각된 상황에서 남북 간 교류사업이 이례적으로 진행돼 그 배경이 주목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오랜 기간 남북관계에서 긴밀하게 활동해 온 북한의 '리호남'의 이름이 다시 등장해 눈길을 끈다.

8일 통일부와 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제주도는 지난 4월 신장투석기와 산림방제용 약품(소나무 재선충약), 한라봉 묘목 50그루 등 총 1억 6000만 원 상당의 대북 협력 물품을 북한의 '조선장애자후원회사' 앞으로 보냈다. 이 사업에는 제주도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이 사용됐다.

제주도는 지난 2월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과 만나 협의를 진행했다. 이때 오영훈 제주지사와 북측 사업가인 리호남의 만남도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리호남이라는 이름은 지난 1998년 이른바 '흑금성'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며 처음 등장했다. 북한에 대한 공작 활동을 위해 국가안전기획부가 파견한 남측 공작원 박채서(흑금성)씨와 소통한 북측 인사가 리호남('리철'로 활동)으로 알려지면서다.

주로 중국 및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리호남은 박 씨의 평양 방문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까지 성사시키면서 동시에 '북풍 공작'에도 관여하는 등 북측 최고위층의 신뢰를 받은 인사로 파악됐다.

흑금성 사건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춘 리호남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그는 최근엔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에도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대남 관련 사업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한 인물로 다시 부각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당국 간 회담 등 공개적인 소통의 전면에 나선 바는 없는 철저한 '비선 인사'로 분류된다.

남측과 접촉할 때마다 '적절한' 명함을 만들어 썼다는 것 외엔 그의 소속이나 나이 등 구체적인 신상명세가 알려지진 않았다. 그가 대남공작기관인 정찰총국(현 정찰정보총국) 소속의 핵심 요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리호남이 직접 제주도와 접촉해 '대북 지원'에 해당하는 교류사업을 성사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대남 기조에 중대한 변화를 준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복수의 민간단체 사이에선 리호남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에도 여러 국내 관계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당국 차원과 민간 차원의 접촉을 분리해 남북관계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차원일 가능성도 거론된다.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로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2022.5.16 ⓒ 뉴스1 조태형 기자

북한은 과거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는 남측의 물자를 받더라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 소재의 '중개인'을 껴서 남측 자금으로 물품을 구입해 제3국을 통해 북한으로 보내거나, 남측 물품이 중개인 명의로 반입되도록 행정 조치를 했다.

이번 사업도 이같은 '제3자 협의' 방식으로 진행됐지만, 오 지사와 리호남이 직접 만나는 등 과거와는 조금 다른 형식의 실무 협의가 진행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선 리호남이 북한 당국의 제대로 된 승인을 받지 않고 '단독 행동'을 했을 가능성과, 북한이 '남북 평화 공존'을 내세운 이재명 정부의 진의 확인을 위해 '리호남 채널'을 가동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정도 사안을 리호남이 당국에 보고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진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짚었다.

하지만 당장 북한이 공식적으로 남북 소통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교류가 전면적인 남북 협력사업 재개로 이어지긴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번 사안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부 이뤄지던 민간 차원의 소통도 다시 막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오 연구위원은 "이번 사례로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기조가 바뀌었다고 보기는 무리"라면서 "다만 북한이 공식적으로는 대남 단절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물밑에서는 본인들이 필요한 물자 등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설명했다.

오 연구위원은 이어 "이번 보도가 나간 이후 북한의 대응 방식 등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당분간은 북한이 남측에 대한 접촉을 자제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예상했다.

plusyou@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