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 트럼프가 부르면, 김정은 골치 아프다[한반도 GPS]

APEC 계기 방한하는 트럼프, 김정은에 '만남' 제안 가능성 커져
'판문점 접촉' 혹은 친서 교환 등 거론

편집자주 ...한반도 외교안보의 오늘을 설명하고, 내일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한 발 더 들어가야 할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짚어보겠습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News1 DB

(서울=뉴스1) 정윤영 기자 = 한미가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개막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남북미 정상의 접촉을 '외교 이벤트' 중 하나로 상정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경주 APEC에 공식 초청한 데 이어 "가능하다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의 만남도 추진해 보자"라고 제안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대해 "매우 슬기로운 제안"이라며 우호적으로 화답했죠. 이 제안이 실제로 성사될 경우, 김정은 총비서는 2018년 5월 26일 이후 약 7년 만에 남한 땅을 밟게 됩니다.

김 총비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후 여러 차례 '러브콜'을 했음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 만나자고 제안할 경우 상황이 약간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2019년 6월 30일에 열린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3자 접촉의 시작점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김 총비서가 직접 경주 APEC에 참석할 가능성은 작아 보입니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국가 전반을 모두 통치하는 유일영도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제100조와 제101조를 살펴보면 김 총비서는 국가와 당, 군을 모두 총괄하는 "국가의 최고영도자"로 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자 협의체인 APEC 정상회의는 21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상호 발언·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구조죠. 게다가 모든 국가가 북한에 호의적일 수는 없을 텐데, 북한의 입장에선 인민들에게 최고지도자가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보이거나, 자신의 최고지도자가 다른 나라의 정상에게 공격과 비판을 받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판문점 접촉은 북한의 부담이 훨씬 적을 겁니다. 북한도 '지분'이 있는 공간에서, 두 명 혹은 세 명의 정상만이 비교적 동등한 입장으로 만남에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총비서의 입을 대신하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달 29일 담화에서 "북미 정상의 개인적 친분이 정책에 반영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다른 측면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의 관측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있고, 만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 총비서의 만남이 성사되면 북미 간의 협상이 개시되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사실 북한이 김 부부장을 통해 '협상과 무관한 정상 간 만남' 자체는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만난다고 협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최고지도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성의를 봐서 만남 요청을 받아준 것'이라는 명분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을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과거 김 총비서와 트럼프 대통령이 주고받은 비공개 친서 내용을 보면, 비핵화 협상의 교착 이후 날 선 공개 담화가 오갈 때도 북미 정상은 각별한 인사를 주고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선 최고지도자의 친서 내용이 공개된 것이 불만이었겠지만, 지금은 이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된 듯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북한이 만남은 고사하되, 또 한 번의 '친서 외교'를 재개하며 한국을 찾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총비서와의 서신 교환에 응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뉴욕 채널' 등 물밑 채널을 통한 사전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김 총비서의 '결단'일 것입니다. 지난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의 변심으로 결렬된 경험은 김 총비서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실무협의를 통해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를 선언하면 미국이 제재 완화 및 해제라는 반대급부를 주기로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에서 영변 외 다른 핵시설까지 폐기할 것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깨진 바 있습니다.

이 실패의 경험은 북한에 '외교는 이벤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경제적 밀착을 강화하며 든든한 우군을 얻은 상황입니다. 과거와 달리 미국과의 대화를 서둘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김 총비서의 셈법은 복잡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분을 기반으로 만남에 나설 수는 있지만, 그 만남이 새로운 협상으로, 북한에 새로운 이익을 주는 외교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복잡한 것은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남과 대화에 일단 '올인'했던 외교가 미국이라는 힘 센 국가의 결정 한 번으로 크게 흔들렸던 경험을 되풀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벤트는 '외교의 시작'이 아닌, '외교의 과정'이 돼야 한다는 것이 과거의 교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yoong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