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비핵화' 내려놓은 李…"北 관심 못 끌고 북핵만 인정" 우려도
'비핵화' 대신 '핵 없는 한반도'…'중단→축소→폐기' 단계적 접근은 유지
'제재 완화-핵·ICBM 중단' 협상안 구체화…北의 '핵보유' 인정 효과는 우려
- 김예슬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번째 유엔 외교에서 '비핵화' 대신 '핵 없는 한반도'라는 표현을 제시하며 대북 정책의 현실적 접근법을 강화했다. 북한이 거부하는 비핵화라는 표현을 잠시 접어두고, 대북제재 완화 혹은 폐지를 조건으로 일단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한다는 '현실적 목표'를 제시해 협상을 빠르게 시작한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다만 '중단→축소→폐기'라는 정부의 단계적 접근법이 북한의 '핵보유'를 공식 인정하는 효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비핵화 약속 없이 일단 대북제재와 핵·미사일의 고도화를 맞바꾸는 '스몰딜' 방식으로 협상을 시작하면 북한이 협상에서 중도 이탈해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다.
이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핵 없는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겠다"며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우선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축소해 나가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또 북미 간 대화가 재개될 수 있도록 한국이 "당사자 간 대화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이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공개된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는 "어차피 특별히 효과적이지도 않은 (대북)제재와 추가적인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 개발 중단을 맞바꾸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을 밝혔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비핵화 구상인 '중단→축소→폐기'라는 접근법은 유지하면서도 각론에서 변화를 준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일단 북한이 최근 큰 거부 반응을 보이는 비핵화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이달 들어서만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을 비롯해 여러 당국자 명의로 수 차례 담화를 내며 핵보유국 입지의 불가역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 부장은 지난 17일 담화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보유국 지위는 그 무엇으로써도 되돌릴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며 "적대세력들이 아무리 수사적으로 부정한다고 해도 공화국의 핵지위가 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영구 고착된 현실은 추호도 변경시킬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비핵화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말이 일방적인 조치에 해당한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국과 미국 역시 자신들의 기준에서 군사적 위협에 해당하는 한미 연합연습을 폐지하거나, 각종 대북 억제력을 위한 한미 간 합의를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대통령이 '핵 없는 한반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비핵화'가 남북은 물론 미국까지 포함된 '공동의 과제'라는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북제재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의 '맞교환'을 협상의 시작점으로 제안한 것은 한국의 기대보다 늦어지고 있는 북미 대화 추동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대화를 추진한다는 입장이기는 하나, 구체적인 의제는 상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페이스메이커'인 한국이 첫 의제를 던진다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이다.
2018년 비핵화 협상이 대북제재 완화 혹은 해제를 기대한 북한이 핵과 ICBM의 개발을 중단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일단 8년 전 수준의 의지로 협상장에 나오기만 해도 제재의 완화·해제가 가능하다는 방침을 확언하면서 북한의 관심을 끌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스몰딜'로 시작하는 협상이 결국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핵·미사일 개발 '중단'은 북한이 이미 가진 핵무기는 그대로 두고 추가 개발만 멈추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약속 없이 제재 완화라는 보상부터 주어지면, 국제사회가 북한의 현재 핵능력을 사실상 용인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가 "영구 고착"됐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비핵화'라는 표현까지 협상 테이블에서 빠지면 북한은 이를 핵 지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선전할 가능성이 크다. 동결 합의가 북한을 법적으로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단 이후 축소와 폐기로 넘어갈 조건과 시간표가 구체화되지 않은 채 협상이 동결 단계에 오래 머물면,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효과가 날 수 있다.
북한이 협상장을 중도 이탈해 핵은 가진 채 이득만 챙기려 할 경우 이를 통제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문제다. 북한이 제재 완화를 얻어낸 뒤 협상을 깨면 기존 핵무기를 보유한 채 경제적 이익까지 손에 쥐게 된다.
'중단' 여부를 확인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멈추는 것만으로는 핵물질 생산과 핵탄두 제조까지 중단됐는지 알 수 없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09년 이후 북한 핵시설을 현장에서 사찰하지 못하고 있다.
한 번 완화한 제재를 되돌리기도 어렵다. 유엔 안보리 제재는 미국의 독자제재와 달리 다시 강화하려면 새 결의가 필요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제재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동결 범위와 검증 방식, 검증 결과에 따른 단계별 제재 완화, 합의 위반 시 혜택을 되돌리는 장치를 협상 초기부터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제재 완화나 해제에 관심을 보일지도 미지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제재 풀기에 집착하여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그러면서 미국이 비핵화 요구를 접고 북한의 핵 보유 현실을 인정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도 내놨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전 참전을 계기로 러시아와 협력을 크게 늘렸고 중국과의 교류도 이어가고 있다. 두 나라의 지원과 교역이 제재의 압박을 덜어주는 만큼, 제재 완화 카드만으로 북한을 협상장에 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제재 완화라는 '당근'과 함께 북한과 중·러의 밀착 고리를 근본적으로 느슨하게 할 방안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에는 북한의 핵 고도화가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로 이어져 중국의 이익에도 어긋난다는 점을, 러시아에는 대북 군사기술 이전이 한러 관계 복원의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설득 논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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