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이산가족 상봉 불발…1년 뒤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남북대화 사료집 공개] 北, 이산가족 상봉과 연계해 '리인모 송환' 강력 요구

1992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한 연형묵 당시 북한 총리의 모습 (통일부 제공)

(서울=뉴스1) 임여익 기자

"리인모 선생처럼 역사의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어 모진 수난을 겪은 인간은 드물 것입니다. 그의 송환 문제는 더이상 지체시킬 수 없는 문제입니다"(연형묵 북한 총리)

1992년 5월 6일 수요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은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씨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리 씨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 자격으로 6·25전쟁에 참가했다가 1952년 지리산에서 체포돼 30년 넘게 한국에서 옥살이를 한 인물이었다.

2일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 회의록편 제6권에 따르면, 남북은 1992년 5월 6일부터 7일까지 서울에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했다. 앞서 양측은 같은해 2월 19일 평양에서 제6차 고위급회담을 열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효한 상태로, 7차 고위급회담은 매우 전향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남북은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운영 합의서 △남북교류·협력공동 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남북연락사무소 설치·운영에 관한 합의서 등 3개 합의서를 채택 및 발효시켰다.

또한, 남북기본합의서 발표 이후 처음 맞는 광복절(8월 15일)을 기념해 양측의 이산가족 노부모 100명과 문화예술인 70명, 취재기자 및 기타인원 70명 등으로 구성된 방문단 교환을 추진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됐다.

다만, 당시 북측 회담 대표였던 연형묵 총리는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의 첫 산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방문단을 상호교환하자"고 말하는 동시에 "리인모 선생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자"고 독촉했다. 이산가족 상봉과 리인모 송환 문제를 맞바꾸자는 요구인 셈이었다.

이후 남북은 방문단 교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92년 6월 5일부터 8월 7일까지 판문점에서 여덟차례의 실무대표접촉을 진행했으나, 북측이 '방문단 교환 이전에 리인모 선생을 송환하지 않으면 교환 사업은 유산될 수 있다'고 밀어붙이며 결국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중단됐다.

같은해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도 리인모 씨 송환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지만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후 북한은 12월 21일부터 서울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제9차 남북고위급회담도 일방적으로 무산시켰다.

이듬해인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출범 한달도 되지 않아 리 씨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후 북한 당국은 한국에서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그에게 '영웅 칭호' 등을 수여하며 극진한 대접을 이어갔다.

이후 1993년 11월 이부영 민주당 의원의 국회 폭로를 계기로 리인모 씨 송환을 둘러싼 남북 간 협상의 전말이 뒤늦게 밝혀졌다. 사실 남북은 1992년 제8차 고위급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리인모 송환 문제를 교환하는데 뜻을 모았지만,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이동복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보가 중간에서 '가짜 훈령'을 북측에 전달하는 바람에 최종 협상이 결렬됐다는 것이다.

이는 국내 정권 교체 국면에서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무산시키고 긴장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집권을 연장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북한으로 돌아간 최초의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씨의 사례는 최근 또다른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 씨를 계기로 재조명됐다. 안 씨는 1953년 4월 체포·구금돼 국방경비법(이적죄)으로 유죄를 선고받아 42년간 복역한 후 1995년 출소한 인물이다. 올해 95세를 맞은 그는 지난달 "남은 생을 북한에서 보내고 싶다"며 자신의 북송을 정부에 요구했지만, 이는 끝내 불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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