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25주년 기획] ③격렬했던 울산 국본의 '직선제' 투쟁

87년 6월 항쟁 당시 울산에서 일어난 거리투쟁은 시위를 넘어 차라리 ‘전투’에 가까웠다.
특히 울산 국본(민주헌법쟁취 울산국민운동본부)을 중심으로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졌던 거리투쟁은 지난해 개봉됐던 영화로 6·25전쟁 당시 고지를 두고 남과 북의 전투를 다뤘던 '고지전'을 방불케 했다.
◇투쟁-1. 울산국본의 거리투쟁
그 '고지전'의 중심에 당시 울산을 대표했던 핵심 상권인 성남동 주리원 백화점(지금의 성남동 뉴코아 아울렛)이 있었다.
삼산동 등 울산의 강남이 개발되기 한참 전이라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였던 주리원 백화점은 시위대나 그들을 막아야 했던 경찰들에게나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울산 국본을 주도했던 울산 통일민주당 당사가 인근 옥교동에 위치해 있어 시위대에게 주리원 백화점은 점령해야 할 일종의 ‘고지’였다.
그 곳에서 시위를 해서 많은 시민들에게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의지를 전달하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던 것. 그러나 불과 5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주리원 백화점까지 진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5월초부터 거의 매일 이뤄진 울산국본의 거리투쟁은 매번 시위대와 경찰들 간의 격렬한 충돌로 이어졌고, 최루탄 등 강력한 시위진압 무기로 무장한 전경들에게 밀렸던 울산국본은 주리원 백화점을 점령하기 위해 다양한 루트로 진입을 시도하게 된다.
처음에는 주로 시계탑 쪽이나 중앙시장을 통한 진입이 이뤄졌지만 시위 참가자가 조금씩 늘면서 시위대는 중부소방서와 당시 코리아나 호텔(지금의 디엔아이)로의 진입도 시도하게 됐다. 다시 말해 주리원 백화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진입시도가 이뤄졌던 것.
그리고 그해 6월10일 서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같은 날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울산의 거리투쟁도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당시 울산 국본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한수호 울산비전포럼 부회장은 “5월 초부터 이미 가투(거리투쟁)를 계속 해왔기 때문에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6월10일 이후로는 시위대들 사이에서는 서로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며 “또 10일 이후에는 시민들의 참여도 급격히 늘면서 거리투쟁에 많은 동력을 얻게 됐다”고 회고했다.
한 부회장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6월10일을 한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울산대학교에서도 신현주 울산대 총여학생회장 등 학생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학생시위대가 울산 국본과의 사전연락을 통해 성남동 주리원 백화점을 집결지로 학교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이들 가운데 신현주 회장 등 9명의 학생들은 경찰들에 의해 잡혀 당시 울산 안기부로 끌려가게 됐다.
그 날 저녁 울산 국본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낮 동안 격렬한 거리투쟁 이후 대규모 전경들의 진압을 피해 울산성당(지금의 복산성당)에 피해 있었다.
당시 울산성당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같은 일종의 민주화 성지였고, 그 안에서 200여명의 시위대들은 ‘오월가(80년 5․18광주민주화 항쟁 당시 불렀던 노래)’를 부르며 집결해 있었다. 물론 성당 밖은 경찰들과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때가 대략 밤 9시쯤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한 수녀로부터 수녀실에 경찰 6명이 있다는 소식이 시위대에게 전해지게 되고, 한 부회장을 비롯해 5명의 시위대원들이 경찰들을 생포하기 위해 투입된다.
울산 국본 쪽에서는 그날 낮에 울산대학교 학생들 9명이 집결지인 주리원 백화점으로 오다가 안기부에 잡혀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터였고, 경찰들을 생포해 학생들과 맞교환을 하려 했던 것.
마침내 특전사 출신의 한 부회장을 비롯해 당시 심완구 국회의원의 동생이었던 심대구 통일민주당 당원, 씨름꾼이었던 유재두 당원, 울산 국본 정치권 간사를 맡았던 김우정 당원 등 5명이 투입됐고, 그들은 수녀실 문과 창문으로 나눠 잠입해 6명의 경찰들을 모두 생포한다.
한 부회장은 “특전사 출신이어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인원을 생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어. 또 유재두 당원의 경우 씨름을 한 사람이어서 순식간에 경찰들을 제압한 뒤 우리가 그들의 손에 수갑을 채웠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3일 성당 앞 정문에서는 잡혀 간 울산대 학생들과 생포된 경찰들 간의 포로교환이 이뤄지게 된다.
한 부회장은 “당시 안기부 울산소장이 ‘이00’씨란 사람이었는데 그의 큰 형인 이장희씨를 내가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를 통해 이00 소장과 통화를 하게 됐다”며 “생포된 경찰들에게는 일부러 고문당하는 듯한 소리를 내게 해서 그 소리를 전화로 이 소장이 듣게 해 결국 9명의 울산대 학생들과 성당 정문 앞에서 포로교환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포로교환은 수가 안 맞으니까 우리 쪽 경찰 1명과 상대 측 학생 2명이 맞교환하는 식으로 이뤄졌다”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6월10일 이후부터 울산 국본 시위대에는 한 가지 큰 변화가 생긴다. 그 때가 막 대학생들 방학이 시작하는 시기여서 서울로 유학 간 대학생들이 고향 울산에 다시 내려와 대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통민당 경남2지구당 조직부장이었던 김위경 (사)아시아태평양환경NGO한국본부 회장은 “6월10일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시위대 숫자가 늘고 능수능란하게 거리투쟁이 이뤄지길래 뭔 일인가 싶어 낯이 익지 않은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지. 알고 봤더니 서울로 유학 간 대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며 “대부분이 서울에서 이미 거리투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이어서 굉장히 능수능란해 거리투쟁에 큰 보탬이 됐다”고 회고했다.
서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와 관련해서는 기억에 남는 일화도 하나 있다.
한 부회장은 “아마도 6월15일쯤이었을 거야. 서울 유학생들과 함께 시위진압을 피해 이번엔 울산교를 넘어 남구 쪽으로 막 퇴각하기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이설된 달동 동해남부선 철로에서 열차가 오는 소리가 막 들렸어. 때 마침 근처 호떡집에 나무가 많이 쌓여 있어서 당시 힘 좋은 유재두 당원 및 학생들과 함께 철로에 나무를 잔뜩 쌓은 뒤 바로 불을 질러 버렸다”며 “그 때문에 오던 열차가 200미터 앞에 멈춰 서서 4시간 정도 정차했다”고 말했다.
한 부회장은 “그런데 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그날 저녁 전국 뉴스에 격렬한 시위현장으로 울산이 소개되기도 했어”라며 “조금은 위험한 시도였지만 그 만큼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에 대한 의지를 알리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시위대가 당시 울산경찰서(현 중부경찰서)를 점령한 사건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6월 10일 이후 시위대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경찰들도 서서히 겁을 먹기 시작했는데, 한 부회장과 유재두 당원 등 한 무리의 시위대가 중부경찰서로 진군해 경찰서를 서너 시간 동안 점령하게 된다.
한 부회장은 “아마도 6월17일 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는 울산경찰서가 북정동에 있었어.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경찰들도 더 이상 감당이 안 되는 상태였고 우리가 경찰서 앞에서 화염병을 던지자 마자 다 도망가더라고. 그래서 서너 시간 정도를 우리가 접수한 뒤 다시 내주었지”라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에 김위경 회장은 “그런데 그날 경찰들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경찰서를 빠져나오는 시위대를 10여명의 경찰들이 덮쳤어. 그런데 당시 시위대에는 씨름과 유도로 단련된 덩치 좋은 유재두 당원이 있어 유 당원 혼자 10여명하고 붙어 전부 제압해버렸지”라고 회고했다.
유재두 당원은 현재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아마 그날 경찰들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거야. 그런데 역시나 그날 저녁에 일이 벌어졌다”며 “울산성당에 피신해 있는데 밤이 되니까 경찰들이 백골단(중무장 전경) 200여명을 이끌고 와서는 성당 주변을 둘러싸 도열한 채 쇠파이프로 땅을 두드리면서 겁을 주는 바람에 나중에 한명씩 조용히 성당을 빠져나와 도망쳤다”고 회고했다.
당시 울산의 거리투쟁 장소로 지금의 시청과 신정시장 부근으로 이어지는 도로변도 격렬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시위대를 주로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울사협(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거리투쟁 총책임자였던 정병문 현 (사)자치분권연구소 울산운영위원장.
지난 15일 만난 정 위원장은 그 때를 회고하면서 “시내 중심가에서도 많이 했지만 지금의 신정시장이 위치한 신정지하도 부근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며 “그 때 당시 내가 핸드마이크를 잡고 주로 시위를 주동했었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그런데 그 때 정말로 감동적이었던 게 한 번은 우리가 백골단에게 쫓겨 신정시장 안으로 도망을 치게 됐는데 백골단을 따돌리고 숨을 조금 돌린 뒤 바지 주머니를 살폈더니 뭔가 두둑하게 쌓여 있었다며”며 “봤더니 당시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도망치는 우리에게 밥이라도 사먹으라고 돈을 넣어 준 것이었다”며 눈시울을 조금 붉혔다.
정 위원장은 “당시 면티 장사 같은 걸로 어렵게 살아가던 상인들이었는데...그 때 그 일을 겪으면서 ‘아. 이 투쟁은 우리가 승리하겠구나’라는 걸 예감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한 부회장도 “당시 우리 시위대는 밥값이 필요없었다”며 “상인들이 우리 시위대가 오면 고생한다며 너도나도 공짜로 밥을 줬다”며 “사실 울산 6월 항쟁의 시작과 동력은 우리 울산 국본으로부터 나왔지만 시민들의 그 같은 지지와 자발적인 참여가 결국은 6·29선언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때 듣고 있던 김 회장도 “사실 당시 시위대와 시민들 간의 거리는 겨우 한 뼘 차이였다”며 “거리투쟁 초기에는 시위대가 도로 위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면 시민들은 보통 보도 위에서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지. 그런데 동력이 붙기 시작한 6월 중순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보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바로 코앞에 쳐진 그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허물어버리고 자발적으로 시위대로 확 붙더라고. 그 때의 희열과 감동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시위대의 세력이 커지면서 시위대는 마침내 6월19일쯤 고지 점령에 성공하게 된다.
시위대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경찰 쪽에서는 이른바 ‘지랄탄(방향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최루탄)’까지 동원하게 되고 그날 주력부대였던 중부소방서 쪽 시위대가 전경들을 당시 천도극장(지금의 울산CGV) 방향으로 유도하자 중앙시장 쪽 시위대가 그 틈을 타 주리원 백화점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한 부회장은 “그 때 당시 중부소방서 쪽 시위대에 있었는데 3분 동안 지랄탄이 거의 300발 넘게 터진 것으로 기억된다”며 “이후 김 동지(김위경)가 있던 중앙시장 쪽 시위대가 밀어 붙여 그날은 최초로 우리가 주리원 백화점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사실 항쟁 기간 동안 시위대가 주리원 백화점을 점령한 것은 그 때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만큼 시위진압 무기로 무장한 경찰 측의 저항도 거셌던 것. 하지만 그날 하루는 주리원 백화점에서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의 만세삼창이 울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뒤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권이양 등의 내용을 담은 6·29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다음은 ‘투쟁’ 두 번째로 ‘울산대학교 거리투쟁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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