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25주년 기획]①1987년 늦은 봄, 울산서 항쟁을 준비하다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는 "저항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죄"라고 말했다. 하지만 비겁함을 떠나 침묵이 옳지 못한 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데 있다.
1987년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헌조치가 내려졌을 때 만약 국민들이 침묵했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체육관에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을 맞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호헌조치 이후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독재 권력에 저항했고, 그들의 고귀한 열정과 희생으로 지금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고 있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6·29선언을 쟁취한 6·10민주화 항쟁이 올해로 벌써 25주기를 맞이했다.
독재 권력에 맞선 전 국민적인 저항이란 점에서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뒤를 잇지만 6·10항쟁은 우리 사회의 흐름 자체를 바꿨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6·29선언 이후 노동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 각계각층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닥쳤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6·29선언 이후 노동운동 등 진보메카로 거듭났지만 6·10항쟁 과정에서도 격렬한 시위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6·10항쟁 25주년을 맞아 뜨거웠던 1987년 울산의 6월을 이끌었던 주역들을 찾아 오는 6월 29일, 6.29선언일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항쟁의 시작, 6.29선언까지의 투쟁 과정, 그리고 그들의 현재 애기를 싣는다.
◇항쟁의 시작-1·민주헌법쟁취 울산국민운동부의 출범
1987년 4월 중순의 어느 늦은 밤, 중구 학성동 구세군 울산교회 지하실에는 16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 구세군 교회 김진석 사관을 비롯해 지역 종교계와 정계, 재야시민운동가들로 구성된 그들은 앞서 4월13일에 내려진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와 관련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종교계에서는 구세군 교회 김 사관을 비롯해 대한성공회 울산성당 전재식 신부, 이완재·김상천 목사 등이 있었고, 정계에서는 당시 야당으로 막 새로 창당한 통일민주당 한수호 중앙상무위원과 김위경 경남 제2지구당(울산시) 조직부장, 이채욱 중앙상무위원 등이 함께 했다.
또 재야시민운동가로는 지금도 울산재야운동가의 대부로 불리고 있는 장태원 울산환경운동연합 고문을 비롯해 진영우·박종희 씨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소속이었다.
이들 16명의 비밀결사대(호헌철폐를 위한 모임)에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멘토로 알려진 법륜 스님의 큰 형님 최영준 당시 카톨릭농민회 울산지부장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이날 첫 회의를 통해 ‘호헌철폐 및 독재타도’를 내용으로 하는 유인물 제작배포와 거리투쟁을 결의했다.
이후 울산 시내 곳곳에서는 그들이 만든 유인물이 날렸고, 거리에서는 산발적으로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울산의 늦봄을 뜨겁게 달궜던 저항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호헌조치 이후 전국적인 저항운동으로 번지기 한참 전 자발적으로 일어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울산의 6·10항쟁은 다른 지역과는 진행 양상이 조금 달랐다. 타 지역이 주로 재야세력이 주축이 된 데 반해 울산에서는 당시 중구 옥교동에 당사가 있었던 통민당 주도하에 저항이 이뤄졌던 것.
특히 그 가운데에 한수호 당시 통민당 중앙상무위원과 김위경 경남 제2지구당 조직부장이 있었다.
학창시절 열혈 운동권 선후배 사이인 한 씨(63세·동국대 70학번)와 김 씨(59세·성균관대 74학번)는 최초 16인의 비밀결사대에도 참여했고, 이후 민주화 이념 확산과 거리 투쟁을 주도했다.
한 씨는 현재 비전울산포럼 부회장을 맡고 있고, 김 씨는 (사)아시아태평양환경NGO한국본부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12일 중구 반구동 비전울산포럼 사무실에서 만난 한 부회장과 김 회장은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 때 울산의 상황부터 언급했다.
먼저 한 부회장은 “당시 울산은 민주화에 대한 이념도 생소했고, 울산 통민당만 해도 거리투쟁 경험이 없다보니 시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울산에 막 내려온 김 동지와 나는 서울에서 운동권에 오래 있다 보니 시위에는 아주 익숙했지.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민주화 이념 확산은 물론 거리투쟁의 선봉에 설 수가 있었어”라고 말했다.
한 부회장은 아직도 후배인 김 회장을 부를 때 ‘동지’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에 김 회장은 “전국적으로 재야 위주로 투쟁이 진행됐지만 울산은 유일하게 정치권, 즉 통민당이 중심이 됐다”며 “당시 재야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라며 정치권은 배척하는 분위기였는데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랜 학생운동 경험으로 논리에서 우리가 앞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거들었다.
실제로 한 부회장과 김 회장은 대학시절 나란히 두 차례의 수감경험과 재적 및 복학을 반복했고, 그로 인해 한 부회장은 6·10항쟁이 터진 그해 초 1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김 회장은 그보다 조금 일찍 1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 본격적인 거리투쟁은 5월 초부터 시작됐는데 이 때 쯤 최초 16인이었던 비밀결사대는 50여명으로 확대된다.
16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상천 목사가 30여명이 넘는 다른 목사들을 영입하면서 규모가 커진 것.
이 때 함께 들어온 사람 가운데는 심규화 현 울산시체육회 사무처장과 지금도 시민운동가로 활동 중인 임상호 전 동구주민회 회장, 통합진보당 김창현 전 울산시당위원장의 부친이자 우리겨레하나되기울산운동본부 북녘국수공장사업본부 공동본부장이었던 고 김기대 씨도 포함돼 있었다.
때 마침 서울에서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결성이 추진 중이었고,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울산에서도 모든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해 50여명이 넘는 이들 비밀결사대를 중심으로 ‘민주헌법쟁취 울산국민운동본부(이하 울산 국본)’ 결성이 추진된다.
이에 따라 이들은 울산 국본의 공동의장으로 세 명의 유력인사들을 추대하는데 그들이 바로 심완구 전 울산시장(당시 통민당 국회의원)과 당시 울산성당(현 복산성당) 손덕만 신부, 남구 대현교회 윤응오 목사였다. 심 전 시장은 정치권, 손 신부는 카톨릭, 윤 목사는 개신교를 각각 대표했다.
이들로부터 공동의장 수락을 받은 비밀결사대는 마침내 지금의 울산시청 뒤 남부빌딩 10호에서 ‘울산 국본’을 정식으로 출범시킨다. 6·10항쟁이 시작되기도 한참 전인 5월 초의 일이었다.
‘정치권’과 ‘재야종교계’가 결합한 울산 국본은 당시 조직 확산을 위해 집행위원회까지 꾸리는데 공동집행위원장이 바로 한수호 부회장과 전재식 신부였다.
또 양 진영 간 공조를 위해 정치권에서는 김우정 당시 통민당 청년부 차장이, 재야종교계에서는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박종희 책임간사가 각각 간사 역을 수행하며 서로 연락을 취했다.
재야종교계는 그 때 당시 울산 유일의 시민사회단체였던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이하 울사협)가 사실상 주도했다. 종교계를 대표해 참여했던 전재식 신부나 이완재·김상천 목사 등 이른바 민주화의식이 강했던 성직자나 신도들 대부분도 울사협 소속이었고, 그들이 지역 종교계의 참여를 이끌었다.
울사협에는 지난 2004년 총선 때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남구 갑 선거에 출마했던 정병문 (사)자치분권연구소 울산운영위원장과 노옥희 전 통합진보당 공동울산시당위원장도 있었다.
정 위원장은 당시 울사협 거리투쟁 총책임자였고, 노 전 위원장은 해직교사로 울사협에서 노동소식지를 제작 중이었다.
또 정치권에서는 당시 통민당 당원이자 일산새마을금고 상무였던 정천석 전 동구청장도 6·10항쟁이 본격화되면서 거리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정 전 청장은 뉴스1과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일산 새마을금고 상무였는데 직원들을 모두 이끌고 자주 거리투쟁에 참여했었다”며 “시위 현장에서 붙잡혀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일도 참 많이 당했지”라며 그 때를 회고했다.
울산 국본의 거리 투쟁을 뒤에서 지원했던 이들도 많다. 그 가운데 특히 당시 성남동 천도극장(현재의 울산CGV) 앞에서 요가학원을 운영했던 윤운룡 현 도투락 식품 대표이사가 유명하다.
현재 청주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박종희 당시 울사협 책임간사는 그 때를 떠올리며 “배고프던 시절이어서 같은 울사협 회원이기도 했던 윤 선생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며 “독립군 시절 군자금을 조달하듯 윤 선생님이 당시 유인물이나 현수막 제작비 등은 물론 거리투쟁 참석자들에게 밥을 챙겨주고, 숨거나 비밀회의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줘서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또 “윤 선생님 본인도 거리투쟁에 자주 참여했었다”고 덧붙였다.
윤 씨는 현재도 사회복지법인 어울림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지역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한 부회장과 김 회장은 “울산 국본의 명칭은 비록 서울에서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같았지만 중앙과는 거의 연계 없이 자발적으로 결성됐고, 또 출범한 뒤에도 독립적으로 운영됐다”며 “그만큼 민주화를 위한 울산의 열정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다음은 '항쟁의 시작' 두 번째로 '울산대학교'편이 이어집니다.
lucas0213@naver.com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