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걷어내자 300년 전 풍경이"…돌아온 '겸재의 수성동'

아파트 지우고, 겸재 그림 되살렸다…오세훈표 수성동계곡 복원
1060억 투입해 기린교·암반·물길 복원…2012년 시민 품으로

수성동 계곡의 전경

(서울=뉴스1) 신건웅 기자 = 가을 기운이 조금씩 짙어지는 9월 중순, 서울 종로구 서촌 골목을 따라 인왕산 쪽으로 올라가면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너른 암반과 나무 사이로 계곡이 이어지고, 비가 내린 뒤에는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주변을 채운다.

종로구 옥인동의 수성동계곡이다. '수성동(水聲洞)'은 물소리가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닿을 수 있어 멀리 떠나지 않고도 숲과 계곡의 정취를 누릴 수 있는 도심 속 휴식처로 꼽힌다.

수성동계곡은 조선시대부터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이름을 알렸다. 왕족과 사대부, 문인들이 즐겨 찾았으며 겸재 정선은 이곳의 풍경을 '장동팔경첩'에 담았다. 추사 김정희도 비 오는 날 수성동계곡의 폭포를 바라보며 시를 남겼다.

그러나 1971년부터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면서 옛 계곡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아파트가 계곡 양옆에 건설되면서 일부 암반과 물길이 콘크리트에 덮였고,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경관도 건물에 가려졌다.

현재의 자연스러운 경관은 대규모 복원 사업을 거쳐 되찾은 모습이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오세훈 시장의 첫 재임기인 2007년이다. 서울시는 노후한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공원과 녹지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정비를 마친 부지를 다른 용도로 개발하는 대신 인왕산의 자연경관을 회복하고 시민에게 개방하는 방안을 택한 것이다.

이듬해인 2008년 2월 서울시는 옥인시범아파트 부지를 도시계획시설인 녹지로 결정하고 토지·건물 보상과 철거에 들어갔다. 2010년에는 이곳을 단순한 녹지가 아닌 겸재 정선의 그림 속 경관을 되살린 역사문화 공간으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오 시장은 수성동계곡을 광화문과 한양도성 등 주변 역사문화 자원과 연계한 명소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복원 방향을 구체화한 것은 계곡에 남아 있던 돌다리 '기린교'였다. 아파트 철거와 현장조사 과정에서 기린교의 역사적 가치가 확인됐고, 겸재의 '수성동'에 그려진 다리와 같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따라 사업은 아파트 철거부지 녹화에서 기린교와 암반, 인왕산 능선이 어우러진 옛 경관을 되살리는 복원 사업으로 확대됐다.

겸재 정선 '장동팔경첩 - 수성동'

수성동계곡과 기린교는 201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됐다. 겸재의 그림과 옛 문헌은 계곡의 위치와 경관을 확인하고 복원 방향을 정하는 주요 자료로 활용됐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수백 년 뒤 도시복원의 근거가 된 것이다.

서울시는 2008년 녹지 결정부터 2012년 복원 완료까지 총 1060억 원을 투입했다. 토지와 건물 보상에 1005억 원, 녹지 조성과 계곡 복원에 55억 원이 들어갔다.

복원은 새로운 시설을 많이 설치하기보다 기존 암반과 자연지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콘크리트에 가려졌던 암반을 최대한 노출해 옥류동천의 물길을 회복하고, 계곡 주변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산철쭉 등 전통 경관과 어울리는 향토수종 1만8477그루를 심었다. 계곡에는 전통 방식의 보막이를 설치하고 사모정과 목교, 산책로 등을 주변 경관을 가리지 않는 범위에서 배치했다.

계곡 입구에는 겸재가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실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관람공간도 마련했다. 이곳에서 '장동팔경첩'의 수성동 그림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면 기린교와 암반, 뒤편의 인왕산 능선이 비슷하게 겹쳐 보인다. 수성동계곡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가장 관심 있게 살펴보는 장면 중 하나다.

복원공사는 2012년 마무리됐으며 같은 해 7월 11일부터 시민에게 개방됐다. 개발과 건축물에 가려졌던 계곡이 약 40년 만에 다시 도심 속 녹지와 역사문화 공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복원사업은 역사·문화·자연경관을 되살린 성과를 인정받아 2014년 대한민국 국토도시디자인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복원된 계곡의 길이는 약 190m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계곡 양옆에 완만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인왕산자락길과도 연결된다. 전망대에 오르면 서촌과 경복궁, 서울 도심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인근 통인시장과 세종마을, 박노수미술관 등을 함께 둘러보는 도보 여행 코스로도 이용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종로 09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경복궁역에서부터 서촌 골목을 따라 걸으면 약 20분 정도 걸린다. 별도의 입장료 없이 상시 개방돼 있다.

수성동계곡은 평소 수량이 많지 않은 건천이다. 비가 내린 직후 방문하면 암반을 따라 흐르는 물과 수성동 특유의 물소리를 보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여름 막바지에는 숲과 바위가 만든 그늘에서 더위를 식힐 수 있고, 가을에는 인왕산자락길과 함께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수성동계곡은 아파트와 콘크리트에 가려졌던 자연과 역사경관을 되살려 시민에게 돌려드린 대표적인 도시복원 사례"라며 "개발 가능한 도심 공간을 단기적인 이익보다 시민 모두가 오래 누릴 공공자산으로 남겼다는 데 의미가 크다. 앞으로도 서촌과 인왕산을 잇는 역사·문화·생태 명소로 세심하게 관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옥인시범아파트 철거와 수성동 복원

ke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