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반도체 광풍, 그 후 도시의 질문

노화욱 반도체와 인문포럼 대표(전 충북도 경제부지사)

공장을 넘어, 문화와 인재의 생태계를 설계하자

반도체 대전환은 대한민국 산업사에 드문 기회를 열고 있다. 수출과 기업 실적, 시가총액, 투자와 고용, 세수 기대에 이르기까지 반도체는 국가경제 전반을 흔드는 핵심축으로 떠올랐다. 가히 반도체 열풍이라 부를 만하다.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국가 산업지도도 빠르게 다시 그려지고 있다. 용인, 이천, 청주, 화성, 평택, 천안, 광주 등 이미 반도체 공장이 있거나 신·증설되는 지역들은 이제 한 기업의 입지나 지방경제의 호재를 넘어, 세계 AI 산업의 공급망을 떠받치는 핵심 도시가 되고 있다.

반도체는 더 이상 특정 산업의 부품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우주개발, 자동차, 국방, 의료, 금융, 통신을 움직이는 현대 문명의 기초 인프라다. 그런 점에서 반도체 공장을 품은 도시는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기술과 자본, 인재와 생활양식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문명사적 현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시작된다. 큰 공장이 들어오고, 투자가 늘고, 고용이 증가하면 도시는 저절로 위대해지는가. 그렇지 않다. 공장은 도시의 몸을 세우고, 산업은 도시의 혈관을 넓히며, 기술은 도시의 속도를 높인다. 그러나 도시의 얼굴과 기억과 품격은 그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과 문화, 역사와 예술, 시민사회와 언론이 함께 길러야 할 몫이다.

세계적 혁신도시들의 역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실리콘밸리는 기업 몇 개가 모여 우연히 탄생한 곳이 아니었다. 대학, 창업가, 투자, 기술문화, 지역사회가 긴 시간 맞물려 만든 생태계였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은 필립스의 산업유산을 디자인과 문화의 자산으로 전환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는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과 청년 창업이 순환하는 지식공동체를 만들었다. 스페인 빌바오는 산업도시의 낡은 이미지를 문화와 공공계획으로 다시 조직했다.

이 사례들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반도체 도시는 공장 유치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도시 전체의 수용력과 해석력이다. 기술을 시민의 언어로 번역하고, 산업을 교육의 내용으로 만들며, 투자를 문화적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성장의 이익을 공공성으로 확장하는 일도 도시가 감당해야 할 과제다.

반도체 투자가 집중되는 도시들은 몇 가지 질문 앞에 서 있다. 지역 대학은 이 산업과 어떤 인재 순환 구조를 만들 것인가. 초중고 교육은 AI와 반도체를 어떻게 시민교양으로 가르칠 것인가. 문화예술인은 이 거대한 기술문명을 어떤 서사와 이미지로 해석할 것인가. 언론은 이를 투자 규모나 성과급의 낙수효과 기사로만 다룰 것인가, 아니면 지역의 운명을 바꾸는 문명사적 사건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방정부는 교통, 주거, 환경, 복지, 문화공간을 산업의 속도에 맞게 준비하고 있는가.

첨단산업이 가져오는 지식과 기회를 인문적 자산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결코 새로운 과제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를 학문과 기억의 자산으로 만들었고, 제주는 추사 김정희의 고통과 예술을 지역문화의 상징으로 품었다. 한 지역의 품격은 외부에서 온 인물과 지식,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승화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의 반도체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기업과 첨단기술이 들어오는 것은 큰 기회다. 그러나 그것을 지역의 교육, 문화, 역사, 예술, 시민적 자부심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도시는 거대한 공장지대에 머물 수 있다. 한때 번영했던 제조업 도시들이 산업 전환과 교육·문화 재생에 실패할 때 어떻게 쇠락하는지는 미국 러스트벨트가 보여 주는 반면교사다. 반대로 이 기회를 잘 해석하고 설계한다면, 한국의 반도체 도시는 산업도시를 넘어 지식도시, 문화도시, 미래문명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역 간 유치 경쟁만이 아니다. 전국의 반도체 도시들이 함께 물어야 할 공통의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산업을 가질 것인가를 넘어, 그 산업 위에 어떤 도시를 세울 것인가. 어떤 인재를 기르고, 어떤 문화를 만들며, 어떤 기억을 후대에 남길 것인가.

기술은 도시의 속도를 만든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는 도시의 방향을 만든다. 산업은 도시를 부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를 품격 있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 기억과 해석의 힘이다.

대한민국의 반도체 도시는 이제 공장 너머를 보아야 한다. AI 시대의 핵심 산업을 품은 도시라면, 그에 걸맞은 시민적 품격과 문화적 상상력도 함께 길러야 한다. 그것이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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