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다시 삶을 이야기하다…괴산군 웰다잉 프로그램 눈길
"내 손으로 떠날 때 입을 옷을 지으며 삶을 배웁니다"
- 이성기 기자
(괴산=뉴스1) 이성기 기자 = "이건 내가 입고 떠날 마지막 옷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지난 28일 충북 괴산군 노인복지관의 한 강의실. 바늘로 한지 천을 한땀 한땀 꿰매는 최복순 씨(72)의 손끝이 떨림 없이 단단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잔잔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최 씨는 괴산군노인복지관이 보건복지부 노인복지 민간단체 지원사업으로 지난 13일부터 12월 19일까지 진행하는 '웰다잉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괴산 연풍면의 한지박물관과 협력해 전통 한지로 지역의 특색을 살려 '수의'를 직접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바느질을 하며 나직이 들려오는 대화는 마치 오래된 친구들의 수다처럼 평화롭다. 프로그램은 단순한 공예활동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고 존엄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수의는 꼭 입고 가야 하나 싶었어요. 그냥 깨끗한 옷 입으면 되지 싶었는데, 직접 만들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최복순 씨는 내내 죽음을 말하면서도 한 번도 어둡지 않았다. "살다 보면 언젠간 떠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떠날 준비를 스스로 하는 건 슬픔이 아니라 감사예요. 내가 걸어온 길을 바느질하면서 다시 한번 되짚는 거죠."
그녀는 젊은 시절 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70이 넘어서는 손주들에게 인생의 온기를 전한다. "손주를 안아보면서 느꼈어요. 내가 떠난 자리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자리라는 걸.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요."
바느질에 몰입한 또 다른 참여자 권혁숙 씨(68)는 "살다 보면 마음이 꼬이고, 원망도 생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바늘로 옷을 만들다 보면 그 마음들이 하나씩 풀려요. 바느질이 인생 같아요. 풀리고, 다시 매어지고. 바느질과 인생은 닮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엔 '내 수의라니…' 싶었는데, 어느새 색깔 맞추고 바느질하다 보면 마음이 정리돼요. 삶을 다림질하듯, 후회도 미련도 조금씩 펴지는 기분입니다"라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괴산군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단순한 웰다잉 교육을 넘어 '관계 회복형 복지' 모델을 시도하고 있다. 한지 수의 제작 외에도 '영상 자서전 만들기'를 진행해 어르신들이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기록하게 한다. '삶의 마무리는 가족에게 짐이 아니라 이야기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노인복지관의 기획 의도다.
황지연 괴산군노인복지관장은 "웰다잉은 죽음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삶을 더 충실히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라며 "어르신들이 자기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회복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복순 씨는 "떠남을 준비하며, 오늘을 배운다"라며 "이제 남은 시간이 두렵지 않아요. 오늘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져요"라며 바늘을 내려놓았다.
괴산의 웰다잉은 결국 '잘 죽는 법'이 아니라 '잘 살아온 나를 안아주는 법'을 알려주는 시간이자 서로를 이어주는 따뜻한 다리가 되고 있다.
sklee@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