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

귀국길 홍콩항에서 6·25 전쟁 발발 소식 들어
전쟁 후 한국 교류 단절…중국서 농학자 활동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자료사진)/뉴스1

(충주=뉴스1) 윤원진 기자 = 광복 80주년을 맞아 기구한 운명의 독립운동가의 일생이 눈길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류자명 선생(1894~1985)이다.

그는 고향 충주에서 3·1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돼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의열단 비밀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작성에 참여했을 정도로 아나키즘 이론에 밝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농학자로 꼽힌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는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2025년 현재에도 이념 대립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역사학계의 설명이다.

류자명 선생 인생의 결정적 변곡점은 1950년 6월 25일이다. 류자명 평전(류연산 작)에는 귀국길에 올랐다가 6·25전쟁 발발로 발걸음을 중국으로 돌려야만 했던 류자명 선생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해방 후 대만에 머물던 류자명은 1950년 6월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3·1 운동을 준비하다가 일본 순사에 쫓겨 고향 충주를 떠난 지 30년 만이었다.

당시에는 대만에서 한국으로 가려면 홍콩을 경유해야 했다. 영국기선을 타고 하루 밤 이틀 낮을 달려서 6월 25일 홍콩항에 도착했다. 선생은 홍콩 여관에 도착해서야 여관 직원에게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오도 가도 못하고 홍콩에 발이 묶인 류자명은 어쩔 바를 몰랐다. 혼자 몸이면 그대로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처자를 데리고 전쟁의 불속으로 갈 수 없었다. 류자명은 중국인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해방 후 바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도 이들이었다.

류자명 선생 손자 류인호씨.(자료사진)/뉴스1

귀국해 고향에 가서 후학을 가르치며 안정된 삶을 살아가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 됐다. 결국 류자명은 중국으로 가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 후난대학은 선생을 교수로 초빙했다. 그러나 류자명은 전쟁이 끝나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이념 대립이 강경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말년의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부르곤 했다는 게 다른 류자명 평전을 집필한 박걸순의 설명이다. 선생은 죽을 때까지 국적이 한국이었다.

정부는 1991년 류자명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전달했다. 그가 별세한 지 6년 만이다. 현재 충북에서 서훈 상향 운동이 한창인 이상설 선생은 건국훈장 애국장 2등급이다.

이런 이유로 류자명선생기념사업회는 2019년부터 류자명 선생 서훈 상향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2025년 현재에도 이념 대립으로 선생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1은 국가보훈부에 류자명이나 이상설 선생의 서훈 상향 심의나 추진 과정이 있는지 물었지만, 훈격 상향을 위한 공적 재평가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국회 임호선 의원(진천·증평·음성)은 지난 6월 13일 상훈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공적심사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서훈 추천·변경·취소를 심의하는 방식을 명시했다.

그동안 서훈 변경에 대한 별도 규정이 없어 정부 성향에 따라 특정 인물에게 추가 서훈을 주거나 아예 서훈 상향을 검토도 안 하는 일이 반복됐다.

상훈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지금까지 저평가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류자명 독립운동기록.(자료사진)/뉴스1

blueseeki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