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기술자' 이근안·'박종철 사건 은폐' 박처원 등 167명 정부포상 취소
12.12, 5.18 진압·계엄업무 관련 76명 76점 박탈
간첩조작 등 국가폭력 관련 91명 122점…경찰 20명·국정원 71명
- 구진욱 기자
(서울=뉴스1) 구진욱 기자 = 정부가 '고문기술자'로 불린 이근안 전 경감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주도한 박처원 전 치안감 등 반헌법적 행위와 국가폭력 사건 관련자 167명에게 수여된 정부포상 198점을 취소했다.
행정안전부는 21일 열린 제31회 국무회의에서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진압, 계엄업무, 간첩조작 사건 등에 연루된 인사들의 정부포상 취소안이 심의·의결됐다고 밝혔다.
행안부와 국방부, 경찰청은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합동브리핑을 열고 정부포상 취소 대상과 사건별 취소 내역, 후속 환수 절차 등을 설명했다.
취소된 정부포상은 모두 198점이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진압, 계엄업무 등 반헌법적 행위 관련자 76명이 받은 무공훈장·포장 등 76점과 간첩조작 등 국가폭력 사건 관련자 91명이 받은 훈·포장과 표창 122점이다.
간첩조작 등 국가폭력 사건 관련 포상 122점 가운데 경찰청 소관은 20명에게 수여된 36점, 국가정보원 소관은 71명에게 수여된 86점이다.
경찰청 소관 취소 포상 36점은 훈장 15점, 포장 3점, 대통령표창 12점, 국무총리표창 6점으로 구성됐다. 과거 고문이나 불법 수사, 사건 조작에 가담한 경찰관이 '간첩 검거'나 '국가보안 유공' 등의 명목으로 받은 포상이 취소 대상이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근안 전 경감과 박처원 전 치안감이다. 이 전 경감은 1970~1980년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으로 근무하며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해 '고문기술자'로 불렸다.
이 전 경감은 신군부의 언론 검열에 반발한 기자들을 고문하고, 1981년 '서울대 무림사건' 수사에 관여한 공로 등으로 내무부 장관 표창을 비롯한 다수의 포상을 받았다. 경찰은 이 가운데 표창 6건이 고문과 사건 조작 등 위법한 공권력 행사와 관련됐다고 판단했다.
박 전 치안감은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의 최종 책임자로, 1987년 박종철 열사가 경찰 조사 중 고문으로 숨진 사건을 축소·은폐한 핵심 인물이다.
당시 경찰은 박 열사의 사망 원인을 설명하며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지만, 이후 물고문으로 숨진 사실과 경찰 지휘부의 조직적인 은폐 정황이 드러났다. 박 전 치안감은 고문 가담 경찰관을 축소하고 허위 진술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박 전 치안감이 받은 훈장 2점과 표창 2점도 이번에 취소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직접 가담한 조한경 전 경위의 표창 2점과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수사관 백남은 전 경감의 훈장 2점·표창 4점도 취소 대상에 포함됐다.
정부는 남민전 사건과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서울대 무림사건 등 과거 간첩조작·공안사건 관련 수사관들에게 수여된 포상도 취소했다.
이들 사건은 수사기관이 불법구금과 고문, 허위자백 강요 등을 통해 간첩 혐의를 조작한 뒤 법원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한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건이다. 피해자가 수십 년 뒤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는데도 수사관들은 간첩 검거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과 표창을 유지해 왔다.
정부는 범죄 사실이 조작돼 무죄가 확정된 이상 이를 수사하거나 검거한 행위를 정당한 공적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거 정부도 2018년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간첩조작 사건 관련자 45명 등의 서훈을 취소한 바 있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진압, 계엄업무 관련 포상도 대거 취소됐다. 군사반란에 가담하거나 비상계엄 확대와 민주화운동 진압에 관여한 군인들이 당시 작전 수행 등을 이유로 받은 무공훈장과 포장이 대상이다.
정부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군사반란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계엄·진압 행위를 국가에 기여한 공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포상을 취소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3월에도 12·12 군사반란 등 반헌법적 범죄에 가담한 10명이 받은 서훈 21점을 '거짓 공적'을 이유로 취소했다. 이어 지난 4월부터 고문·간첩조작과 반헌법적 행위 등으로 받은 정부포상을 전면 재검토해 왔다.
이번 조치는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폭력 가해자에게 수여된 포상을 박탈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지 약 넉 달 만에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월 29일 경찰의 정부포상 전수조사 소식을 언급하며 "사법살인 같은 최악의 국가폭력 범죄자에게 준 훈·포장 박탈은 만시지탄이나 당연한 조치"라고 밝혔다. 국가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형사 공소시효와 민사상 소멸시효를 배제하는 입법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찰청은 이에 따라 1945년 창설 이후 경찰관들에게 수여된 정부포상과 대통령·국무총리 표창 7만여건의 공적 내용을 전수조사했다. 고문과 사건 조작, 불법 공권력 행사로 만들어진 실적이 포상으로 이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상훈법은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지거나 국가안전에 관한 죄로 형을 받은 경우, 사형·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이 확정된 경우 정부포상을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포상 취소 내용을 관보에 게재하고 훈장과 포장, 증서 등 포상물을 환수할 방침이다. 취소된 포상은 정부의 공식 상훈 기록에서도 삭제된다.
김영수 행안부 의정관은 "반헌법적 행위와 간첩조작 사건 등 국가폭력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받은 정부포상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며 "정부포상의 공정성과 영예성을 회복하기 위해 부적절한 포상을 지속해서 발굴하고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kjwowe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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