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보다 단오더비"…교문 뜯고 싸우던 '강릉판 엘클라시코'

단오장보다 북적였던 강릉제일고 vs 강릉중앙고 축구정기전
80년 라이벌 역사 품고 20일 다시 격돌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의 축구정기전. 두 학교 간 대결은 강릉단오제 기간 열려 '단오더비'로 불리기도 한다.(뉴스1 DB)

(강릉=뉴스1) 윤왕근 기자 =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멕시코의 경기(19일)가 끝나면 원조 구도(球都) 강릉 축구팬들의 시선은 곧바로 다른 경기로 향한다.

'2026 강릉단오제'가 한창인 20일 열리는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의 축구 정기전, 이른바 '단오더비'다.

월드컵이 세계인의 축구축제라면 단오더비는 강릉 사람들의 축구축제다.

강릉 토박이들 사이에선 지금도 "월드컵보다 농상전이 더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만큼 단오더비는 단순한 고교 축구경기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기억이자 자존심이었다.

지금은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 라이벌전의 뿌리는 강릉상고와 강릉농공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농공고의 '농'(農)과 강릉상고의 '상'(商)을 따 '농상전' 또는 '상농전'으로 불렸던 이 경기는 한때 강릉을 대표하는 최대 스포츠 이벤트였다.

이름을 두고 양교 동문 사이에서 농담 섞인 신경전이 오가기도 한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연고전'·'고연전' 논쟁과 비슷한 문화가 강릉에도 존재하는 셈이다.

과거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의 '단오 더비'에서 강릉제일고 응원단의 열띤 응원 모습.(뉴스1 DB)

1935년 창단한 강릉농공고 축구부와 1941년 창단한 강릉상고 축구부는 1940년대부터 각종 지역 대회와 단오제 축구대회에서 맞붙으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당시 영동권 최고의 실업계 명문으로 꼽히던 두 학교는 지역 인재들이 가장 선망하던 학교였다. 학교의 명성은 곧 동문의 자부심이었고, 축구는 그 자부심을 증명하는 대리전이었다.

강릉상고 졸업생들이 은행과 농협, 공직사회로 진출했다면 농공고 졸업생들은 한전과 철도, 건설·기계 분야 산업현장으로 향했다. 지역사회 곳곳에 양교 출신들이 포진해 있었고, 농상전은 사실상 강릉 사회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라이벌전 '엘클라시코'에 빗대 '강릉판 엘클라시코'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았다.

1976년 단오제 기간 시작된 농상전은 단오장을 찾은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운동장으로 끌어모았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운동장은 단오장 못지않게 붐볐고,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과 시민들까지 몰려들었다.

선수들끼리 거친 몸싸움이 벌어지면 응원석도 들끓었다. 재학생들의 신경전은 곧 동문의 자존심 대결로 번졌고, 시내 전체가 두 학교 응원전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지역에선 지금도 "교문을 뜯어다 남대천에 갖다 버렸다", "깃발을 빼앗아 왔다"는 다소 과격한 무용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강릉중앙고 응원단 자료사진.(뉴스1 DB)

과열된 경쟁은 결국 부작용도 낳았다. 1982년 단오제 기간 열린 정기전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서 한동안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양교 동문은 전통을 지켜냈고, 1994년 정기전은 부활했다.

세월이 흐르며 학교 이름도 바뀌었다. 강릉상고는 인문계로 전환하며 강릉제일고가 됐고, 강릉농공고는 특성화고 체제를 유지한 채 강릉중앙고가 됐다. 현재 정기전은 '강릉정기전' 또는 '단오더비'로 불린다.

바뀐 것은 이름만이 아니다. 한때 강릉상고와 강릉농공고는 산업화 시대 한국 사회와 강릉을 떠받친 '최전선 인재 양성소' 역할을 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이 보편화되고 인문계 중심의 입시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과거 실업계 명문이 가졌던 상징성도 희미해졌다. 지역사회 곳곳에서 상고와 농공고 출신들이 경쟁하던 풍경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됐다.

농상전의 열기가 예전 같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응원 문화도 예전만 못하지만, 단오더비가 강릉 축구의 뿌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는 오랜 기간 수많은 축구선수를 배출했고, 강원FC와 강릉시민축구단으로 이어지는 지역 축구 문화의 토대를 다져왔다.

양팀 선수단 기념촬영.(뉴스1 DB)

공교롭게도 올해 단오더비는 월드컵 열기와 맞물려 열린다.

올해 강릉단오제는 '풀리니, 단오다'를 주제로 22일까지 강릉 남대천 일원에서 열린다. 제례와 단오굿, 관노가면극, 민속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축제장을 채운다. 단오장이 강릉 사람들의 흥을 풀어내는 공간이라면, 단오더비는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지역의 자존심과 승리욕을 풀어내는 무대다.

김동찬 강릉단오제위원장은 "'단오더비'는 축구 경기인 동시에 강릉의 역사와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며 "'풀리니, 단오다'라는 말처럼 단오제에서 마음껏 웃고 즐기며 일상의 근심을 내려놓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wgjh654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