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도입, 과연 안향일까"…소장학자의 문제제기

전북대 전가람 박사, 앞선 시대 '김구(金坵)부자'역할 제시

전북대에서 진행된 한국성리학의 도입 학술대회(자료사진) /뉴스1 ⓒ News1 DB

(전주=뉴스1) 김대홍 기자 =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도입된 시기는 언제이고 그 토대를 닦은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까지 국내 학계는 고려사의 기록에 따라 성리학의 도입 시기를 고려 말인 1300년 전후로 보고 있다.

안향이 충렬왕15년인 1289년에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또 백이정이 1298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10년간 머무르면서 정자와 주자의 성리학 서적을 구해 돌아온 뒤 이를 동문들과 서로 강의해 전수했다는 것을 인용해 1308년 이후 고려에 성리학의 학문적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본다.

이 같은 학설은 1930년대 제기된 이래 국내 학계에서 하나의 통설이 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전의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젊은 학자의 논문이 발표됐다.

안향과 백이정에 의해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고려의 학풍이 갑자기 성리학으로 바뀐 것이라기보다 그 이전에 이를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북대학교 BK21+ 한중문화 화이부동 연구 창의인재양성사업단(이하 전북대 BK+사업단)은 3일 전북대에서 ‘부안3현의 학문과 사상, 어떻게 계승‧활용‧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전가람 전북대BK+사업단 박사는 ‘안향 성리학도입설의 근거와 김구(金坵)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전 박사는 “고려말 성리학을 도입한 인물은 안향과 백이정이라는 설이 기정사실화되어 이들은 한국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대되고 있다”면서 “두 사람의 공이 컸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지식, 사상이 전파될 때 단기간에 특정한 인물에 의해 갑작스럽게 들어올 수는 없고 오히려 점진적으로 유입됐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성리학이 정치담론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새로운 정치주체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도통(道通) 체계를 수립했으며, 이 과정에서 도입과 전래 과정을 지나치게 축소해 준비기의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한시켰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유학사에서는 도통의 전승을 안향에서 백이정-우탁-권보-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서술하고 있다.

◇안향 이전의 성리학 준비기 활동한 ‘김구’는 누구

지포(止浦) 김구는 안양보다 32년 앞선 고려 말의 문신이다.

그는 1240년부터 이듬해까지 서장관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권신 최항이 ‘원각경’의 발문을 쓰라고 하자 이를 조롱하는 시를 지었다가 좌천된 뒤 10년간 정계를 떠나 있었다.

이후 최항이 죽자 1257년 한림원으로 복귀해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의 한림학사인 왕악과 서신을 통한 교유를 하게 된다.

왕악은 고문과 경서에 해박하고 황제의 칙령을 담은 문서를 전담했으며 원 세조에게 효경과 역경 등을 강의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당시 김구가 쓴 고려의 외교문서를 본 왕악은 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김구를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김구는 그런 인물과 서신으로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성리학적 사상을 접했고 이를 고려 말 당시 정치적인 모순 극복과 구조적 위기를 해소하려는 가정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전 박사는 “김구의 유학부흥의 의지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드러나고 있다”고 제시한다. 고종19년인 1232년 22세의 나이로 과거에 응시해 2등으로 급제한 김구를 위로하는 김양경에게 김구는 계(啓)를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한다.

여기에서 그는 고려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지칭하며, 삼천리가 모두 ‘예의의 강산’이라고 하여 남송의 주자와 북송의 소식과 정이 등이 중시한 ‘예(禮)’의 가치를 숭상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전 박사는 김구의 이름(坵)과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의 상관성, 자인 차산(次山)은 두 번째 산이라는 뜻으로 ‘공자의 뒤를 이을 다음 산은 바로 자신’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담았으며 호인 지포(止浦) 또한 대학의 3강령 중의 하나인 ‘지극한 선에 머문다’는 뜻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 유래했음을 인용해 밝혔다.

강릉향교 창건 700년 기념행사. 2013.9.29/뉴스1

◇김구의 아들과 사후의 업적

전 박사는 또 김구를 배향했던 부안군 연곡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이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동(道東)의 의미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는 ‘도동곡(道東曲)’은 풍기군수인 주세붕이 1541년 안향을 동방도학의 조상으로 추존하고 그 공을 주자에 견주려는 목적으로 지어진 경기체가이다. 그러나 김구를 배향한 도동서원의 건립 시기는 이보다 7년 앞선 1534년.

김구의 사당에 ‘도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데 대해 전 박사는 1266년 김구가 왕악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 단서를 제시한다.

전 박사는 “김구가 왕악에게 쓴 이 편지의 내용 가운데 주목해야 할 점은 왕악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가 ‘유풍을 숭상한지 오래’라고 말한 점”이라며 “또 왕악은 ‘조정광기(祖庭廣記)를 하사하신다면 우리의 도가 동방으로 전해지게 됨(吾道之東)을 기뻐할 것’이라고 하여 고려 조정에 ‘조정광기’를 보낼 것을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면서 ‘도가 동쪽으로 전해지다(道之東)’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기록을 참고해 후세에서 김구를 배향한 사당에 ‘도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 박사의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전 박사는 국내 최고로 알려진 강릉향교의 건립과정에 김구의 아들인 김여우와 김승인이 직접적으로 참여한 점을 들었다.

전 박사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적 바탕을 마련하고 새로운 사상으로서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김구 부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95mink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