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게으르면 어때"…제주 길목에 뿌리내린 쉼의 공간 '간세'
[제주어 가게로 보는 제주 Ⅱ] ④ 간세
게으름의 제주어, 가치 있는 쉼으로 재해석
- 오미란 기자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좁ᄊᆞᆯ만이 간세헷당 담돌만이 움직인다'
좁쌀만큼 게을렀다가 돌덩이만큼 움직이게 된다는 뜻의 제주어 속담이다. 거친 바다와 척박한 땅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옛 제주 사람들은 이토록 쉼을 경계하고 타박했다.
여기서 '간세'는 게으름을 뜻하는 제주어다. 게으름을 피우면 '간세ᄒᆞᆫ다'고 한다. 게으름쟁이들은 '간세다리', '간세둥이', '간세꾸레기'로 불리곤 한다.
그러나 쉼이 사라진 요즘 시대에 '간세'가 던지는 메시지는 완전히 새롭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들판을 한가로이 노니는 제주 조랑말의 모습에서 착안해 장거리 도보 여행길 '올레길'의 마스코트 이름을 '간세'라고 지으면서,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되찾는 '가치 있는 쉼'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올레꾼들은 올레길 곳곳에 설치된 이 '간세'를 따라 걷는다. 시작점에서 종점을 향해 정방향으로 걷는 경우 간세의 머리가 향한 쪽이 길의 진행방향이어서다. 일종의 이정표다. 볼거리가 있는 곳에는 간세 몸통에 얹힌 안장에 안내 문구도 쓰여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풍광을 즐기면서 나무와 풀, 흙과 돌멩이 하나하나 살피며 느긋하게 '간세다리'처럼 걸으면 표식을 놓치지 않는다"고 재치 있게 안내하고 있다.
요즘 '간세'는 쉼의 공간으로도 불린다.
서귀포시 서귀동 제주올레여행자센터 앞에 마련된 복합휴양공간을 비롯해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민박, 제주시 이도2동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서귀포시 서귀동에 있는 공방,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한식당 등에는 모두 '간세'라는 이름이 당당히 내걸려 있다.
제주올레여행자센터 근처에 있는 족욕 카페,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농장 등에는 '간세다리'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다.
모두 손님들에게 쉼을 선물하고자 하는 각 공간 주인의 세심한 철학이 담긴 선택들이다.
양하철 간세 게스트하우스 대표는 "바로 옆에 한라산행 버스들이 많이 다니는 정류장이 있어서 국내외 등산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편"이라면서 "이곳에서만큼은 간세하며 편안히 쉬어가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렇게 이름을 짓게 됐다"고 웃음 지었다.
올레길 창시자 고(故) 서명숙 전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도 저서 '놀멍 쉬멍 걸으멍(놀며 쉬며 걸으며의 제주어)'에 이렇게 썼다.
"가파른 속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기를, 잠시라도 일 중독자에서 '간세다리'가 돼 보기를. 고등어 등 빛보다 더 푸른 바다를 보면서, 귓전을 파고드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싱그러운 바닷바람에 흔들리면서, 감미로윤 귤꽃 향기에 취하면서."
※이 기사는 뉴스1 제주본부와 제주도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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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유네스코 소멸 위기 언어인 제주어가 제주 골목상권의 새로운 브랜드로 숨 쉬고 있습니다. 뉴스1 제주본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2차례에 걸쳐 제주어 상호를 지닌 매장을 탐방하고, 해당 제주어의 언어적 가치와 그 속에 담긴 정겨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기획기사가 다루는 제주어 상호들은 뉴스1 제주본부 제주어 선정위원회(허영선 시인, 김순자 전 제주학연구센터장, 배영환 제주대학교 인문대학장, 김미진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의 심사를 거쳐 선정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