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기억, 인권의 기준으로…제주평화인권헌장의 의미

"4·3 정신 계승 인류 보편의 평화와 인권 담아"
법적 구속력보다는 도민 자발성에 주안점

제주평화인권헌장 선포식(제주도 제공)/뉴스1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지난 10일 선포된 '제주평화인권헌장'은 제주4·3의 역사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제주4·3의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현재의 기준으로 만들고 그 기준을 도민 스스로 논의하고 정리해 왔다는 점이 제주평화인권헌장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국가 폭력으로 자행된 4·3의 비극과 오랜 침묵, 차별은 제주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동시에 화해와 상생이라는 4·3의 정신은 제주가 평화와 인권을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게 한 배경이 됐다.

헌장은 4·3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4·3의 진실을 알 권리와 기억할 권리, 희생과 상처의 회복, 왜곡과 폄훼에 대응할 책임을 현재의 인권 문제로 연결한다.

◇제주평화인권헌장 어떤 과정 거쳤나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2023년 제주평화인권헌장 제정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는 4·3의 화해와 상생 가치를 계승해 인류 보편의 평화와 인권을 제주의 미래 가치로 확립하고, 세계 속 인권도시 구현을 위한 도민 행동강령과 규범을 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024년에는 도민 참여를 중심으로 제정 작업이 본격화됐다. 공개모집을 통해 구성된 도민참여단 100명은 연령과 성별, 지역을 아우르는 다양한 도민들로 꾸려졌다. 10대 학생부터 60대까지, 제주시와 서귀포시 주민이 지역·성별·연령 비율을 고려해 무작위로 뽑혔다. 이들은 4월부터 5월까지 네 차례의 원탁토론을 거치며 헌장의 뼈대를 직접 만들었다.

한 참가자는 "다양한 연령대의 도민들이 모여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면서 스스로 헌장안을 마련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제주평화인권헌장 도민참여단 회의(제주도 제공)/뉴스1

2024년 9월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도민공청회가 열어 총 916건의 의견을 검토하고 기독교계 등 다양한 단체와의 간담회와 방송 찬반토론회도 개최했다.

제정 과정에서 논쟁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헌장 일부 조항이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어 가정과 교육 현장, 청소년 보호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정위원회는 헌장 논의가 시작되고 약 2년 만인 올해 4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준용한 행정검토의견을 반영해 최종안을 의결했고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도 부대의견과 함께 헌장안을 심의·의결했다. 논쟁이 있던 문구 중 '성별 정체성'은 헌장 최종안에서 제외됐다.

◇4·3 정신 바탕 인류보편적 기준 담아…강제보다 자발성

이렇게 만들어진 제주평화인권헌장은 총 10장 40조로 구성됐다.

헌장은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 헌법 등 국내외 인권 규범의 보편 원칙과 약속을 담았다.

구체적으로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 △4·3의 진실을 알 권리·기억할 권리·회복할 권리·왜곡 등에 대응할 권리 △평화롭게 살 권리 △민주적 참여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권리 △공공정보 접근권 △재난·재해로부터의 안전 △학대·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안전한 노동환경 △건강권·먹거리권·사생활 보호 등 도민의 삶 전 영역에서 존중받아야 할 핵심 인권 기준이 담겼다.

제주평화인권헌장 선포식(제주도 제공)/뉴스1

헌장 교육·홍보 확대, 인권침해 및 차별 구제 절차 마련, 도민 참여 기반의 개정 절차 등도 포함됐다.

다만 헌장은 법적 강제력이나 처벌 조항을 두지 않는다. 헌장에 담긴 내용이 행정 규제나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헌장이 법의 구속력이 아니라 자발성에 주안점을 둬서라고 제주도는 설명했다.

헌장 선포는 하나의 마침표라기보다 과정의 연장선에 가깝다. 헌장 제40조에는 도민 누구나 헌장 개정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도내 23개의 단체로 구성된 제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헌장 선포 이후 "제주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연대회의는 "도민의 끊임없는 제정요구를 오영훈 지사가 공약으로 수용하면서 공식적으로 추진됐다"며 "계획을 세우고 제정위원회를 출범하는 등 1년여 준비기간을 거쳤다. 이는 도민들의 의견을 보다 세밀하게 경청하고 모아내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kd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