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원도심 안경집 사장님 손에서 이어지는 '수눌음 정신'

[제주어 가게로 보는 제주]② 수눌음안경
"평등과 공존의 소산…공동체 회복 위해 계승해야"

편집자주 ...뉴스1은 도내 상점 간판과 상호를 통해 제주어의 의미를 짚어보고, 제주어의 가치와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매주 1회 12차례 보도한다. 이번 기획기사와 기사에 쓰인 제주어 상호는 뉴스1 제주본부 제주어 선정위원(허영선 시인, 김순자 전 제주학연구센터장, 배영환 제주대학교 국어문화원장, 김미진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들의 심사를 받았다.

제주시 동문로에 위치한 '수눌음 안경'.

(제주=뉴스1) 오현지 기자 = 제주 대표 원도심인 동문로에는 초록색 간판이 눈에 띄는 '수눌음 안경'이 있다. 이웃이 함께 힘든 일을 서로 도와 번갈아 가면서 한다는 뜻의 제주어 '수눌음'에서 상호명을 그대로 따왔다.

상호에는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사장 여호근 씨의 인생관이 투영돼 있다.

독실한 신자인 그는 전국 안경원에서 후원 받은 안경을 선교 활동 차 떠난 캄보디아, 파키스탄 등에 기부해 왔다. 여 씨는 "7년 전 안경원을 인수하면서 상호명을 고민하다 평소 생각과 맞닿아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라는 의미의 제주어 상호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전 시작한 이쑤시개 공예로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기도 한 유명인사다.

여 씨는 코로나19로 동네 상권에 칼바람이 불었을 당시 주변 가게들을 돌며 직접 만든 이쑤시개 작품을 선물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이겨내자'는 의미에서 나눈 선물은 원도심 상권의 서로 돕는 수눌음 문화로 이어졌다.

그는 "이쑤시개 작품을 선물해 드리니 주변의 가게들이 고맙다며 안경원에 와서 팔아주고 홍보해주고, 저도 자주 가서 팔아준다"며 "이런 모습이야말로 공동체의 삶이고 수눌음 정신의 발로가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제주어 수눌음은 이웃끼리 일손을 서로 빌리며 서로 돕는 품앗이와 같은 의미지만,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척박한 자연환경이 빚어낸 제주 고유의 전통이다.

수눌음안경원 사장 여호근 씨. 뒤로 그가 이쑤시개로 제작한 작품들이 보인다.

수눌다의 수는 손 수(手) 혹은 머리 수(首) 자에 '가리다'는 의미인 '눌다'가 결합해 만들어진 어휘다. 옛말 '누리'에서 온 제주어 '눌'은 표준어 '가리'(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장작 따위를 차곡차곡 쌓은 더미)에 대응하는 어휘다.

제주에서 ‘수눌어서 하는 일’에는 경계가 없다. 수눌음은 1차 산업인 농어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동관행으로 자리 잡았지만, 의식과 생활 곳곳에도 뿌리 깊이 정착했다.

바람 많고 돌 많은 화산섬 제주는 밭농사가 주를 이뤘다. 힘든 밭일 가운데 검질매기(김매기)는 가장 고된 노동에 속한다. 각자 자기 밭에서 열흘씩 꼬박 매달려야 끝낼 수 있었던 검질매기를 이웃끼리 도우며하니 힘든 줄 모르고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혼례를 치르기 전날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는 제주의 고유한 가문잔치도 수눌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고, 대사인 장례도 이웃끼리 치렀다.

방언학자 김순자 박사(전 제주학연구센터장)는 "수눌음은 제주의 문화를 한층 풍부하게 해 주었다"면서 "수눌음은 평등과 배려, 공존, 나눔, 지혜의 소산이며 수눌음을 통해 이웃 간에 규약이나 약속, 질서가 자연스럽게 유지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또 "공동체가 많이 허물어진 오늘날의 현대 사회가 필요한 덕목이 힘든 일을 함께하며 이겨냈던 우리 선인들의 수눌음 정신인 것 같다"며 "제주 사회의 무너진 공동체 회복을 위해서라도 ‘수눌음’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환경과 생활 문화가 바뀌며 제주의 수눌음 문화는 예전처럼 유지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수눌음안경’ 주인 여 씨의 사례처럼 수눌음 정신은 사회적 연대로 재해석되면서 제주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oho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