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슴허라" 한강이 그린 '그 동굴'…4·3 유적지 '평화기행'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연계 기행서 76년전 광풍 되살려
- 오현지 기자
(서귀포=뉴스1) 오현지 기자 =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정심'이 4·3희생자인 아버지와 숨어들었던 동굴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정심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속슴허라(조용히 해라)'다.
24일 오전 정심의 이야기와 꼭 닮은 아픔이 있는 곳,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서 소설 속 이 대목이 낭독됐다.
큰넓궤는 1948년 11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후 동광리 주민 100여 명이 토벌대를 피해 2개월여 간 은신생활을 한 용암동굴이다.
소설에는 '어둠 속에서, 다른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결에라도 내가 소리 내지 않게 하려고. 언제 그 굴 앞을 지나갈지 모를 존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라는 구절이 나온다.
강덕환 시인은 "굴 속에서 속슴하라는 말, 또 꿈결에라도 소리칠까봐 입 막을 준비를 했다는 내용은 모두 실제"라며 "아기가 울면 토벌대에 발각될까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죽은 사례도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이날 큰넓궤를 비롯한 주요 4·3 유적지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 속 장면과 실제 역사적 현장을 대조해보는 평화기행 '4·3유적지에서 되살리는 문학과 기억의 대화'가 열렸다. 기행에는 제주4·3 유족회와 부녀회, 청년회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강인화 씨는 "어머니도 4·3 당시 동굴 속에 숨었다고 하셨는데 오늘 와서 보니 그 고통을 안고 어떻게 사셨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며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신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말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큰넓궤를 둘러본 참가자들은 인근의 헛묘로 향해 생존자와 희생자들의 삶을 돌아봤다.
4·3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을 역임한 강인국 제주작가회의 회장은 "큰넓궤에 숨었다가 발각된 주민들이 정방폭포에서 총살 당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며 "그래서 동광리에는 시신 없는 묘인 헛묘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서는 4·3 당시 불에 타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 '섯단마을'과 시오름주둔소를 찾아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와 당시 상황을 이해하며 역사적 상흔을 되짚었다. 또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와 유적자간 연계 가능성을 논의하는 토론이 이어졌다.
도 관계자는 "오늘 기행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며, 소설 속의 배경과 연결되는 4·3 유적지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지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말했다.
oho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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