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마음이 움직였다면, 소리가 완성됩니다"…이선희 명창의 철학

[만나고 싶었습니다] 후학 양성 위한 '경기도립 창극단' 필요성 강조

편집자주 ...전국 최대 규모 지방정부인 경기도에는 토박이는 물론 호남과 영남, 충청권 등 전국 인재들까지 몰려들면서 각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만나 경기도와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들어본다.

이선희 명창이 경기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개인 작업실에서 뉴스1과 만나 국악인으로서의 자부심, 국악이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해법 등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News1 김영운 기자

(수원=뉴스1) 송용환 기자 = 늦가을 오후,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속에 오래된 소리판의 여운이 스친다. 그 결을 평생 좇아온 사람이 있다. 판소리 외길 43년, 이선희 명창이다. 그녀에게 판소리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삶의 무늬를 이루는 숨결이자 세대를 연결하는 매개체다.

이선희 명창은 "처음 판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 딱 박히는 떨림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소리는 제 삶을 이끌었죠"라며, 소리꾼의 길로 접어든 계기를 설명했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자란 소녀에게 판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항구 도시의 활기와 사람들의 생활음은 자연스러운 배경음처럼 그녀의 감각을 열었다. 6세, 목포시립국악원에서 하루 종일 놀며 배우던 그 시절, 한국무용·판소리·고법·가야금까지 네 가지 전통예술을 한자리에서 익혔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판소리가 전공이 된 것이다.

이선희 명창은 "그때는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몰랐어요.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고, 무엇보다 즐거웠죠. 하기 싫은 마음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라고 회상한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92년, 그는 안숙선 명창에게 사사하며 소리꾼으로서의 본격적인 길을 걸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니라 삶 전체를 배우는 시간이었고, 행동과 마음으로 스승을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판소리 강점으로 '가사의 표현력'을 꼽았다. 판소리는 단순히 표면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관객이 자기 경험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판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소리의 '이면'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사를 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체험을 관객이 간접 경험하도록 전달하는 거죠"라며 "관객이 '그 소리를 통해 내 마음이 움직였다'고 느낄 때 비로소 소리가 완성됩니다"라고 전했다.

국악의 대중화 전략도 강요가 아닌 '익숙함'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은 익숙한 것에 마음을 엽니다. 국악도 마찬가지예요. 자주 보고 듣고 경험해야 관심이 생기죠"라며 "과거에는 명절 프로그램이나 씨름 중계에 국악이 자연스럽게 등장했어요. 아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지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이선희 명창이 19일 경기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개인 작업실에서 진행된 뉴스1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News1 김영운 기자

이선희 명창은 경기도의 문화 환경을 지적하며, 후학 양성을 위한 지역 문화 인프라 확충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경기도에 도립창극단 하나만 있어도 아이들의 직업과 무대가 확보되고, 다양한 공연과 축제가 가능해집니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국악을 경험하고 꿈을 꾸게 되죠"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판소리는 전성기가 40대 후반, 50대 초반이다. 청소년들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른 분야로 빠지는 이유는 단순한 관심 부족이 아니라 환경과 기회가 부족해서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이선희 명창은 "아이들이 국악을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접할 기회가 없어서 떠나는 겁니다. 포기하지 않도록 공연과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이라고 지적한다.

이선희 명창은 내년,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책 출간과 완창 공연을 준비 중이다. 책은 4계절을 주제로, 특정 곡을 들으며 그 의미와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할 예정이다.

이 명창은 "국악이 어렵거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누구나 편하게 읽고 들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소리와 글이 함께 살아있는 경험을 주고 싶어요"라며 출간 취지를 설명했다.

완창 공연도 준비 중이며, '춘향가'가 유력하다. 공연과 책을 통해 전통의 깊이를 관객과 독자에게 동시에 전하려 한다.

인터뷰 마지막에 그는 조용히 "평생 소리를 해왔지만 결국 남는 것은 사람입니다. 스승, 동료, 제자, 관객… 그 모두가 제 소리를 완성해 주었죠"라며 말했다.

기술과 형식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경험이 소리를 완성한다는 진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가을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선희 명창이 말하는 전통의 불씨는 여전히 따뜻하고 밝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목소리, 그 시간을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도 조용히 울릴 판소리의 숨결. 그것이 바로 그녀가 걸어온 길이자, 전통이 살아가는 이유다.

◆주요 약력

△1978년 전남 목포 출생 △경기 안양시 거주 중 △목포대성초·목포항도여중(2학년)·서울양평중(졸업)·여의도여고(1학년)·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 졸업) △이화여대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판소리전공 △같은 대학 한국음악 석사·박사 △1995년 신라문화제 전국국악대경연 학생부 판소리 부문 금상 △2010년 제22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명창부 최우수상 △2023년 제35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명창부 대상(대통령상) △2025년 6월 만정제 '춘향가' 완창.

sy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