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차만 봐도 도망쳤는데"…조국 품에 안긴 독립운동가 후손들

광주 고려인마을서 특별귀화자 초청 감사행사
"이름도 몰랐던 할아버지, 이제는 삶의 이유"

27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진료소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특별귀화자 3인이 홍범도 장군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25.6.27/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

(광주=뉴스1) 박지현 기자 = "그동안 불법체류자로 살면서 경찰차만 봐도 도망 다녔어요. 그런데 이제는 당당하게 병원도 가는 국민이 됐습니다"

광주에 뿌리내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국적을 얻고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광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는 호국보훈의달을 맞아 27일 오전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특별귀화자 초청 감사행사'를 열었다.

대한의군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최병직 열사의 손녀 최순애 씨(64), 항일비밀결사 활동을 했던 박노순 열사의 외손녀 박림마 씨(68), 그리고 박 씨의 고손자 우가이 예고르 군(11)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주 경로와 체류 경험을 거쳐 귀화에 성공했고, 행사에서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조부모 세대의 기억을 풀어놨다.

"나라 없는 서러움, 끝났어요"
27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진료소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 특별귀화자 초청 감사행사에서 박림마 씨가 가족사를 공유하고 있다. 2025.6.27/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

박림마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를 거쳐 4년 전 한국에 정착했다. 박노순 열사의 외손녀인 그는 2022년 특별귀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지금은 광주 인근의 과일 창고에서 분류작업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박노순 열사는 1896년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태어나 1918년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적위군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연해주 다반부대 소속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으며, 이후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한국에 와서 시민이 됐다. 믿기지 않을 만큼 감사한 일이다"며 "우리 가족 모두, 오랜 세월 떠돌았던 삶을 이젠 끝냈다"고 전했다.

박 씨의 손자 우가이 예고르 군은 올해 11살로 하남초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KBO리그 경기에서 시타자로 나서 주목을 받았다. 이날 행사장에서도 수줍지만 명랑한 모습으로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박 씨는 "광주에서 아이가 뛰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손자의 앞날에 기대를 걸었다.

"할아버지 덕에 여기까지 왔어요"
27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진료소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 특별귀화자 초청 감사행사에서 최순애 씨(65·여)가 가족사를 공유하고 있다. 2025.6.27/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

중국에서 태어난 최순애 씨는 대한의군부에서 활동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최병직 열사의 손녀다.

그의 가족은 일제강점기 만주로 이주한 뒤 현지에 정착하면서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최 씨는 지난 199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건설 현장과 식당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

불법체류자로 살아오던 그는 2016년 특별귀화를 통해 국적을 얻었다. 지금은 광주 북구 용두동에 거주하며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최 씨는 "경찰차만 봐도 몸이 굳고 자다가도 단속이 무서워 일어날 정도였다"며 "그런데 할아버지 덕분에 이젠 당당히 대한민국 사람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옥고를 치르다 사망한 탓에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지만 친언니 등을 통해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는 "한때는 이름조차 잘 몰랐지만 이제는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할아버지께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젠 조국이 우리 가족입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세 사람은 한결같이 "조국이 우리를 받아줬다"는 말로 귀화를 되돌아봤다. 과거를 묻는 질문엔 눈시울이 붉어졌고 조부모 이야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떨렸다.

최순애 씨는 "아무리 외국에 살아도 마음속에는 늘 조국이 있었다. 할아버지 뜻을 이어 이렇게 다시 조국에 돌아온 것 같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박림마 씨도 "처음엔 이 땅에 받아들여질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주민등록증도 있고 주소도 있다"며 웃었다.

광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 관계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귀화는 단순한 국적 취득이 아니라 역사적 복원의 의미가 있다"며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war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