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 민주화운동 헌신 故 이규호 역작 ‘나그함마디 문서’ 한국어판 출간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복음서 52편 국내 첫 완역판
1981년 '한울회' 공안조작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재야 신학자로 연구 매진
- 최일 기자
(대전=뉴스1) 최일 기자 = 대전·충남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고(故) 이규호 선생(1958~2021)의 유작(遺作)으로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靈智主義) 복음서 52편을 국내 최초로 완역(完譯)한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도서출판 동연)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기독교 사상의 양대 뿌리 중 하나인 영지주의 경전으로 ‘도마복음’, ‘요한 비밀의 서’, ‘베드로의 묵시록’ 등이 수록된 나그함마디 문서는 1600여 년간 정통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마을 근처에서 어느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영혼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것으로 초기 기독교 사상이 정립되던 1세기부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고 소수파를 형성했다. 그러다 일명 ‘삼위일체(三位一體) 논쟁’이 벌어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의 신성은 부정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상으로 규정돼 파문(破門)되고 말았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초기 기독교 형성 시기에 등장했다가 4세기경 박해를 받아 지하로 사라졌던 영지주의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서구 신학계에선 이미 각 문서에 대한 논쟁과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고, 문서의 번역도 여러 차례 진행돼 결실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신학자들이 서구에서 공부하며 ‘나그함마디 문서’를 직·간접적으로 접했지만 한국 교회의 보수성으로 인해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관심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재야 신학자 이규호 선생의 생전 역작인 한국어판 ‘나그함마디 문서’가 번역 작업을 마무리한 지 20년, 그의 사후(死後) 1년만에 발간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영지주의는 정통을 독점한 주류 기독교 내에서 한때 이단으로 정죄당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져간 듯했다. 그러나 면면히 서구 지성사를 관통하고 그 사상사 저변에 복류(伏流)하면서 서구 근대의 지성에 적잖은 자양분을 공급해왔다.
이규호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인 2002년 6월 20일자로 작성된 이 책 후기에서 “‘나그함마디 문서’는 20세기 최대의 발견 중 하나다. 이 문서를 통해 우리는 영지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를 얻게 됐다”며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과 같다고 믿는다. 이 점은 우주의 비밀과 더불어 영지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는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이다. 이 점에서 영지주의는 철저한 일원론”이라고 강조했다.
충남대 사학과와 목원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고인은 대전상고 강사로 재직하던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조작사건인 ‘한울회’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 대전기독청년협의회장, 대전충남기독교사회운동연합 정책실장 등을 맡아 지역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투옥 중 받은 고문으로 얻은 병고와 가난이라는 생존의 벽 앞에서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신비주의에 매료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종 종교학 원서를 구입해 연구에 몰두했다. 탁월한 어학 실력으로 10여권의 책을 ‘이서하’라는 필명으로 번역했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2년여간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5월 별세했다.
한국어판 ‘나그함마디 문서’의 감수를 맡은 목원대 신학과 이정순 교수(이규호선생기념사업회장)는 “이규호 선생은 별세하기 전 저에게 자신이 2002년 번역을 마무리한 ‘나그함마디 문서’ 출판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만큼 이 책은 고인의 삶이 그대로 배어 있는 귀한 번역서”라며 “독자들 모두 좀 더 폭넓고 깊이 있게 기독교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영지주의 전통에 대한 활발한 학문적 논쟁이 한국 신학계에서 일어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choi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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