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내통' 누명 유족들 77년 만에 국가배상 길 열려
식량 약탈 당한 농민 '협조자'로 총살…"1.9억 배상"
대법 "소멸시효로 패소 확정됐어도 재소송 가능"
- 신성훈 기자
(영덕=뉴스1) 신성훈 기자 = 6·25전쟁 전후 경북 영덕에서 빨치산에게 식량을 빼앗기거나 위협에 못 이겨 음식을 제공했다가 '내통자'로 몰려 군경에 희생된 민간인 유족들에게 국가배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24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전날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가 영덕 민간인 희생 사건 피해자 유족 등 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구지법으로 돌려보냈다.
피해자는 1949년 7월 경찰의 좌익세력 소탕 작전 과정에서 재판 절차 없이 총살됐다.
유족들은 2012년 국가에 손해배상소송을 냈고 법원이 경찰의 행위를 불법으로 인정했지만, 사망 이후 5년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23년 8월 영덕에서 군경이 좌익 활동이나 빨치산 협조 혐의 등을 이유로 피해자를 포함한 민간인 20명을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한 행위를 불법으로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유족들이 다시 소송을 냈지만 2024년 4월 1심과 지난해 5월 2심에서도 '앞선 확정판결의 효력이 미친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올해 2월 26일 시행된 개정 과거사정리법을 들어 "과거 소멸시효를 이유로 패소가 확정됐더라도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피해자와 유족은 법 시행일부터 3년 이내 다시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개정법 시행 당시 이미 재소송이 진행 중인 사건에도 이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첫 대법원 판단이다.
영덕에서는 빨치산에게 식량을 빼앗기고도 '내통자'로 몰려 군경에 총살된 농민의 유족이 국가배상을 받은 사례도 있다.
영덕군 지품면 산간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A 씨의 선친은 1949년 12월 10명이 넘는 빨치산이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약탈했다 군경에 연행됐다.
빨치산의 위협에 못 이겨 음식을 제공했는데도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재판도 없이 총살됐다.
서울중앙지법은 2024년 9월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 없이 단순히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의심만으로 법적 절차 없이 살해당했다"며 "국가가 유족에게 1억 92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사건 발생 75년 만이다.
당시 영덕 산간지역 주민들은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 사이에 놓여 있었다. 빨치산은 산간마을에서 식량을 확보하고 경찰지서 등을 습격했으며, 군경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빨치산의 요구를 거부하면 생명을 위협받고, 위협에 못 이겨 식량을 제공하면 군경에 협조자로 의심 받는 처지였다.
피해 규모는 1960년 국회 조사에서 영덕지역 민간인 희생자가 574명으로 집계됐으며 2009년 경북대 연구팀 조사에서는 1093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영덕군 117개 법정리 가운데 102개 리에서 피해가 확인됐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과거 소멸시효를 이유로 국가배상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피해자들에게 다시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유사 과거사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sh484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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