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째 양력설 쇠는 경북 영양 주실마을의 새해 첫날

5세부터 90세까지 일가족 25명 모여 세배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휘영(90·왼쪽)씨가 세배를 마친 자식과 손주들에게 덕담을 건네자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승무」를 지은 시인 조지훈(1920~1968·본명 동탁)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시인의 호에서 따온 지훈문학관이 있는 이곳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1928년 무렵부터 100년 가까이 양력설을 쇠고 있다. 2020.1.1/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휘영(90·왼쪽)씨가 세배를 마친 며느리에게 세뱃돈을 주고 있다. 2020.1.1/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영양=뉴스1) 남승렬 기자 = "할아버지·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냐, 너희들도 새해에 하는 일 전부 잘 되거라.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다."

아흔의 조휘영 할아버지는 미리 준비한 세뱃돈을 손주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며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세뱃돈을 받은 손주는 5세 범준이부터 10대 후반, 2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설을 쇠기 위해 전날 서울, 부산, 대전, 대구, 안동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가족만 25명에 이르렀다.

3대(代)에 이르는 대가족은 5세부터 90세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모습을 지켜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은 "아버님이 오늘 지출을 너무 많이 하신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93년째 양력설 쇠는 영양 '주실마을'

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 첫날인 1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조휘영씨 집은 설 분위기로 넘쳐났다.

한양(漢陽) 조(趙)씨 집성촌인 주실마을 조씨 문중은 93년째 양력설을 쇠고 있다.

주실마을의 조씨 문중이 양력설을 쇠기 시작한 것은 1928년으로 전해진다.

1900년대 초 실학사상을 수학한 조상들이 신문물을 받아들여 양력 1월1일을 새해 첫날로 본 것이다.

주실마을은 태백산맥 일월산(해발 1219m) 자락에 위치해 있다.

청록파 시인으로 '승무', '지조론', '낙화', '고풍의상' 등의 작품을 남긴 조지훈(1920~1968, 본명 동탁)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 정면에는 붓끝을 뜻하는 문필봉(文筆峰)과 벼루를 뜻하는 연적봉(硯滴峰) 등 봉우리들이 자리한다.

이 마을은 조지훈을 비롯해 문인과 학자 등을 많이 배출했다. 한 마을에서 수십명의 학자가 나오는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이 마을 조씨 가문은 재물, 사람, 문장 등 세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를 가훈으로 삼는 등 꼿꼿한 선비 정신으로 자부심이 높다.

영양이 '문향의 고장'으로 불리는 배경에는 주실마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휘영(90·왼쪽)씨가 세배를 마친 손주들에게 세뱃돈을 나눠주고 있다. 2020.1.1/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설 아침 분주…일가친척 40여명 한 자리

주실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은 멀다. 영양군과 가까운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시간 가량 달려 영양군 입암면과 영양읍, 일월면 소재지를 지나야 닿는 청정지역이다.

새해 첫날 찾은 주실마을 조씨 가문은 동이 트기 전부터 차례 준비로 바빴다.

오전 7시20분쯤 조씨의 집안의 며느리와 딸들은 정성스럽게 손질한 과일과 문어숙회 등 제수 음식상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와 사위들은 모두 두루마기를 입고 덕담을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쪽 방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고, 몇몇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연신 눈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8시쯤 세배할 시간이 다가오자 조씨와 부인 김수자씨(78), 조씨 동생 목영씨(72) 내외 등 어른들이 자식, 조카, 손주들에게 나눠줄 세뱃돈을 준비했다.

세배가 끝나기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

이어 차례가 시작되자 새벽부터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이 하나둘씩 상에 올랐고, 8촌 이내의 일가까지 모두 40명을 헤아렸다.

김수자 여사는 "양력설을 쇠기 때문에 아이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오늘 가야 해서 아쉽다"면서도 "1년에 하루 뿐인 설이지만 가족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제일 기쁜 날"이라며 웃었다.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휘영(90)씨 집에서 문중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있다. 2020.1.1/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주실마을 조동호(63) 이장은 "전통의 미를 간직한 마을이면서도 개화사상을 일찍 습득해 마을의 문화 자체가 진취적이고 개혁적"이라며 "30~40대 시절에는 양력설을 쇠러 오는 사람들로 동네가 북적댔다"고 회고했다.

조 이장은 "문중의 어른들이 한분 두분 돌아가셔서 지금은 예전보다 설을 쇠러 오는 사람이 줄었지만 올해도 오랜만에 다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눴다"며 "그게 바로 설 명절 아니겠느냐"고 했다.

pdnams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