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만 있는 지역은 들러리인가"…4대 항만공사 통합에 술렁이는 부산
시민사회·시의회 잇단 철회 촉구…부산시는 공식 입장 없어
통합 효율성 놓고 의견 엇갈려…"지역 자기결정권 보장해야"
- 홍윤 기자
(부산=뉴스1) 홍윤 기자 = 정부가 부산·울산·여수광양·인천 등 4대 항만공사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부산 지역에서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
항만별 기능과 배후산업이 다른 만큼 획일적인 통합이 오히려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게 반대 측의 주장이다. 반면 통합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중복 기능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와 일부 분야에서 통합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부산시가 아직 뚜렷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서 지역에서는 통합 찬반을 넘어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항만도시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6일 지역 시민사회 등에 따르면 4대 항만공사 통합에 반대하는 단체들은 최근 민주당 부산시당과 부산시 등을 향해 잇따라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부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부산항만공사(BPA) 노동조합은 지난 12일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을 만나 '항만공사 통·폐합 철회 의견서'를 전달했다.
해양수도부산발전협의회 등 부산항 관련 시민사회단체들도 부산시의회와 국회 등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산시의회는 지난 11일 '전국 4대 항만공사 강제 통합 추진 철회 촉구 결의안'을 본회의에서 원안 가결했다.
반대 측이 가장 먼저 내세우는 이유는 항만마다 역할과 배후산업이 다르다는 점이다.
부산항은 글로벌 환적항 기능이 강하고 북극항로 거점항만을 준비하고 있다. 인천항은 수도권과 대중국 물류, 울산항은 액체화물과 에너지 물류, 여수광양항은 석유화학·철강 등 국가 기간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항만공사를 하나의 체제로 묶을 경우 각 지역의 산업구조와 물류 특성을 반영한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항만 운영과 투자 결정에서 지역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행 항만공사법 시행령에 따르면 각 항만공사의 최고 심의·의결기구인 항만위원회는 비상임위원 7명으로 구성된다. 항만 소재지를 관할하는 광역시장이나 도지사는 이 가운데 3명 이내를 추천할 수 있다.
부산 시민사회는 항만공사가 통합될 경우 의사결정 구조가 더 커지는 만큼 부산항에서 발생한 수익의 재투자와 시설 투자 우선순위 등에 지역 의견을 반영할 별도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BPA는 지난해 매출 4049억 원, 영업이익 1417억 원, 당기순이익 439억 원을 기록하며 22년 연속 흑자를 냈다.
지역에서는 이런 항만의 수익과 투자 여력이 통합 이후 어디에, 어떤 기준으로 배분될지도 사전에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대 측에서는 해외 주요 항만의 운영구조도 근거로 들고 있다.
세계 최대 항만 가운데 하나인 네덜란드 로테르담항만공사는 로테르담시가 70.83%, 네덜란드 정부가 29.1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방정부가 최대주주로 항만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구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항 역시 LA시 산하 항만국 형태로 운영된다. 항만 운영을 감독하는 항만위원은 시장이 임명하고 시의회가 승인한다.
시민사회는 이처럼 세계 주요 항만에서 지방정부가 항만 운영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례가 있는 만큼 국내 항만공사 개편에서도 지역의 권한을 어떻게 보장할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해외 항만의 법적 지위와 국가별 행정체계가 서로 다른 만큼 이를 국내 항만공사 구조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지만 부산시는 현재까지 항만공사 통합과 관련한 별도의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부산시가 통합 항만공사 본사를 부산에 유치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 아니냐는 관측부터, 정부의 개편 방향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입장을 내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다만 통합 공사의 본사가 부산에 들어오더라도 부산시가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해양수도'라는 상징성 외에 실질적인 효과가 제한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통합을 전제로 각 항만공사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부산·울산·인천·여수광양 항만공사를 각각 자회사 형태로 유지하고 상위에 통합 항만공사를 두는 방식이다.
이 경우 각 항만의 전문성과 지역성을 유지하면서 해외 터미널 투자 등 개별 항만공사가 단독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대형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거론된다.
반대로 모회사와 자회사를 함께 두는 구조가 새로운 관리조직을 추가하는 '옥상옥'이 될 경우 정부가 내세우는 경영 효율화 취지와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박홍배 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은 최근 부산지역 상공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항만마다 취급하는 화물의 성격이 다른 만큼 지금처럼 지역별 항만공사를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어느 정도 결정이 나 있는 문제인 만큼 말을 아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도 각 항만의 특성을 살리는 방향의 통합을 추진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부산에서 모든 이해관계자가 통합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부산항보안공사노동조합은 일정한 조건이 갖춰진다면 통합을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 각 항만공사 아래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되는 항만 보안기관을 하나의 독립조직으로 통합할 경우 재정구조와 인력 운용을 개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부산항 보안 분야에서는 낮은 항만시설보안료 징수율 등에 따른 예산 부족과 인력난이 오랜 과제로 지적돼 왔다. 노조는 조직 통합을 통해 안정적인 재원과 인력 충원 체계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근무 여건 개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항만공사 통합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평가는 분야별로 엇갈린다.
찬반을 떠나 부산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정부가 통합 필요성과 구체적인 개편 방식에 대해 지역사회와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는 정부가 항만 간 과당경쟁 해소와 국가 항만 경쟁력 강화, 경영 효율성 등을 통합 필요성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 개편 과정에서 항만별 투자 우선순위와 수익 재투자 원칙, 자산·부채 관리 방식 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논의의 초점은 4개 항만공사를 하나로 합치느냐, 그대로 두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산 출신 경제학자인 양준호 인천대 교수는 "항만은 물류와 제조업, 서비스업, 도시계획, 먹거리 등을 잇는 지역경제의 입구이자 출구"라며 "시설이나 기관 하나를 붙잡아 두자는 논의를 넘어 항만의 현장인 지역이 더 이상 들러리가 되지 않고 경제적 자기결정권을 갖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4대 항만공사를 어떤 형태로 개편하든 효율성과 국가 물류 경쟁력뿐 아니라 서로 다른 항만의 기능을 어떻게 유지할지, 지역의 의사결정 참여와 투자 권한을 어떻게 보장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와 설명이 먼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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