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말기암 환자 임종 직전 DNR 철회…공식 철회 건수 가파르게 증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공식 철회 누적 3000건 돌파
정근 "현장 중심 완화의료 인프라 확충 시급"

연명진료포기 의향서 접수 상담 모습.(대한종합병원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부산=뉴스1) 임순택 기자 = 생의 마지막 순간,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DNR)'를 작성했던 말기 암 환자가 임종 직전 뜻을 번복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제도의 취지가 현장에서는 오히려 환자를 극심한 고통으로 내모는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어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9일 전남 보성에서 부산의 한 종합병원으로 68세 말기 암 환자 A 씨가 긴급 이송됐다. 당초 연명의료를 거부했던 A 씨의 보호자 측은 "고향인 부산에서 장례까지 모시고 싶다"며 병원 측에 수용을 요청했다. 그러나 수 시간에 걸친 고된 이동 끝에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중환자실 입원 절차를 밟으려던 찰나, 보호자 측이 돌연 "연명치료를 받겠다"며 "과거 수술을 받았던 서울의 대형 병원으로 당장 가겠다"고 뜻을 바꾼 것이다.

의료진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보성에서 부산까지 오는 동안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 환자를 서울까지 다시 밤샘 이송하는 것은 심정지 등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급차 안에서는 응급 상황이 발생해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의료진이 간곡히 만류했지만, 생사의 문턱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가족들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A 씨는 DNR을 철회하고 또다시 사설 구급차에 실려 서울로 향했다. 현장의 한 의료진은 "의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환자에게 너무 가혹한 결정이었지만, 연명치료를 고집하는 이상 현행법상 병원이 이를 강제로 막을 방법이 없어 무력감만 느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임종 직전 연명의료 거부 의사를 번복하고 치료를 고집하는 사례는 의료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공식 철회 건수는 2019년 100여 건에서 매년 가파르게 증가해 2025년 누적 3000건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변심의 가장 큰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환자가 마주하는 본능적인 공포감이다. 둘째는 가족 간의 갈등이다. 자녀나 배우자가 "치료를 포기하는 것은 불효이자 도리가 아니다"라며 강하게 요구할 경우, 환자가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연명치료로 선회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공식적인 서류 취소 외에도 응급실 현장에서 구두로 의사를 번복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갈등 사례는 통계보다 훨씬 심각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환자의 변심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의 한계에 있다. 이 법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엄격히 보장하고 있지만, 정작 의료 현장에서는 '회생 불가능한 말기'와 '사망이 임박한 임종기'의 의학적 경계가 모호해 혼란을 빚고 있다. 의료진 입장에선 섣불리 임종기로 판단해 연명의료를 중단했다가 훗날 법적 소송에 휘말릴 수 있어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사)대한종합병원협회 정근 대표회장은 "현행 제도는 임종 시점을 기술적으로 연장하거나 앞당기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말기 환자들이 장거리 이송 등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만드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환자가 진정으로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일관되게 준비할 수 있도록 현장 중심의 완화의료(호스피스)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고, 임종기 판단 기준에 법적 유연성을 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limst6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