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 거장이 되다 ①] 공황장애 딛고 붓 든 '바비수' 정수연 작가

"그림 그릴 땐 욕심, 과거 후회 같은 잡념이 사라져"

편집자주 ...뉴스1의 '비전공, 거장이 되다'는 정식 예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삶의 굴곡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창작 활동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우리 주변 이웃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예술의 힘을 증명하고 있는 숨은 작가들을 만나봅니다.

우승하(또우) 작가(오른쪽)와 정수연(바비수) 작가.(2026.3.22/뉴스1 ⓒ News1 임순택 기자

(부산=뉴스1) 임순택 기자 = 40대 늦은 나이에 찾아온 유산의 아픔, 연이은 건강 악화, 그리고 공황장애. 삶의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그림은 그에게 새로운 생명줄이 되었다. 붓을 잡은 지는 얼마 안 됐지만, 하루 한 점씩 그림을 쏟아내며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바비수(본명 정수연)' 작가를 만났다.

정 작가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일본 동지사 대학과 오사카 외국어대학 등에서 영화 평론가와 언어학을 전공하며 꿈을 키웠지만, 타향살이의 고립감과 상처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30대 내내 힘든 시기를 보냈다. 40대에 늦깎이 결혼을 한 뒤에는 시험관 시술 끝에 얻은 쌍둥이를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고, 설상가상으로 호르몬제 부작용과 암 조직 발견 등 건강마저 악화됐다.

"모든 걸 다 잃은 상실감이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어 병원을 찾았는데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죠."

1년 6개월간 힘든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중, 정 작가는 남편과 함께 방문한 갤러리에서 운명처럼 그림을 만났다. '또우갤러리'를 운영하던 우승하 작가는 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그림을 권유했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정 작가였지만, "붓을 든 사람이 주인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라"라는 우 작가의 말에 용기를 얻어 붓을 잡게 됐다.

정수연(바비수) 작가.(2026.3.22/뉴스1 ⓒ News1 임순택 기자

정 작가는 그림을 통해 스스로를 비워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아팠던 이유는 어쩌면 너무 욕심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되니 마음의 병이 온 거죠. 그림을 그릴 때는 그런 욕심이나 과거의 후회 같은 잡념이 사라집니다."

그는 구도나 색채 같은 미술의 기본 이론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 무지가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캔버스 위에 마음 가는 대로 붓질을 하다 보면 밤을 지새우는 일도 허다하다.

"스승님이 캔버스를 덮고 다시 그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틀려도 괜찮다는 걸 배웠죠. 그림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공황장애 약도 많이 줄이게 됐고, 얼굴엔 미소가 번지게 되었습니다."

정수연(바비수) 작가.(2026.3.22/뉴스1 ⓒ News1 임순택 기자

정 작가의 캔버스에는 늘 꽃과 함께 '바비 인형'을 닮은 소녀들이 등장한다. 활동명 '바비수' 역시 또우 스승님이 제 그림에 바비 인형 느낌의 여러 여자가 등장하니 바비라고 불렀고, 그뒤에 저 이름 '수연'의 '수'를 합쳐 '바비수'가 됐다고 했다.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다 보면 어느새 여자아이가 그림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제 내면의 어떤 모습이 투영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붓을 잡은 이후 하루에 한 점씩, 현재까지 4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려냈다. 하지만 정 작가는 "이 모든 그림을 '미완성'이라고 생각한다"며 "전시회나 거창한 목표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누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그림과 짧은 단상을 담은 에세이집을 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정 작가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들, 내 몸, 내 방, 내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세요. 나를 돌보지 않으면 결국 그 상처는 병이 되어 돌아옵니다. 스스로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limst6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