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서리꽃 만발한 겨울왕국…향적봉선 '산그리메' 풍경화
덕유산 횡단 17㎞…부드러운 능선이 품어 주던 곳, 상고대도 반긴다
- 신용석 기자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아무리 산이 좋아도 이 추위에, 그렇게 멀리, 그렇게 높은 산에 가야 하는가? 라고 물어도 “꼭 가야 한다!”고 답하는 이유는 그곳에 겨울의 아름다운 동양화, 즉 순백의 설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설경의 재료는 곧 눈꽃과 상고대다. 눈은 알겠는데, 상고대는 무엇인가?
눈이 오지 않았는데 산의 정상부가 하얗게 보이면 그것은 상고대 때문이다. 상고대는 공기에 떠있는 물방울, 즉 구름과 안개의 수분이 나뭇가지에 닿아 얼어붙은 서리다. 상고대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화상(花霜/서리꽃)이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나무에 수북이 쌓여 푸근한 느낌을 주는 눈꽃과 비교해, 상고대는 나뭇가지의 위, 아래, 나무줄기, 바위를 가리지 않고 거칠게 엉겨붙어 야성적인 느낌을 준다.
덕유산!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눈꽃산행을 하건, 스키를 타건 겨울산으로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덕유산은 스키장이 들어설 만큼 눈이 많이 오고, 습기를 머금은 구름과 안개가 많아 상고대가 생길 확률이 높다. 또한 그런 눈꽃과 상고대의 아름다움을 받쳐 줄 장쾌한 고원과 거목들이 세팅되어 있다. 접근성도 좋아서, 스키장 곤도라를 타고 순식간에 산 정상에 도착하거나, 두세 시간의 산행 끝에, 또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설경의 세계에 빠져드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오늘의 코스는 서쪽 칠연계곡으로 동엽령에 올라, 산 등어리를 타고 향적봉에 이른 후, 동쪽 구천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총 17㎞의 횡단 탐방로다. 하루 일정의 산행으로 덕유산의 진면목을 충분히 체감하면서 기나긴 설경을 즐길 수 있는 코스다.
◇ 안성 탐방지원센터~칠연삼거리~동엽령 4.2㎞ “아름다운 상고대, 은빛 세계 속으로”
칠연계곡 입구의 주차장은 전국 도처에서 온 단체산행 버스들이 사람들을 내려놓느라 부산하다. 저마다 주의사항과 집결장소를 알리는 전국 사투리가 뒤섞인 가운데, 탐방로 입구를 통과하니, 바로 왼쪽으로 50m 거리에 칠연의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직전에 덕유산의 이곳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임도를 걷는 길 30분 끝에 칠연삼거리에 도착한다. 여기서 칠연폭포를 보려면 300m를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연속된 일곱 개의 못으로 떨어진다 해서 칠연(七淵)폭포인데, 깊고 고요한 숲속에 이렇게 예쁜 폭포가 연이어 있다니! 하고 경탄하게 된다. 폭포 안쪽에 광릉요강꽃 보호구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몇천촉 남지 않은, 증식이 정말 어려운, 애지중지 보존해야 할 국보급 꽃이다. 산길은 좁아지고 오르막이 이어지며 고도를 높인다. 올라갈수록 숲에는 상고대, 계곡에는 얼음의 ‘화이트 컬러’가 짙어진다. “곰탕(흐린 날씨)이 갤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상고대가 보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사항이다.
출발한 지 2시간, 긴 오르막 끝에 회색 하늘이 열리고, 드디어 동엽령에 올라섰다. 탁 트인 능선에서 가슴이 뻥 뚫리지만, 차가운 바람이 쌩하며 코를 때리고, 축축한 등어리가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다른 세상에 온 것이다. 몇사람은 강풍을 피하라고 설치한 안전쉼터 안으로 들어가서, 나머지 사람들은 바람이 잔잔한 나무데크에 내려서서 아이젠과 스패츠, 넥워머, 방풍복을 착용한다. 순식간에 손가락이 얼어 손놀림을 하기 어렵다. 이런 일은 능선에 도착하기 직전에 했어야 한다.
◇ 동엽령~중봉~향적봉 4.3㎞ “상고대 터널 뚫고, 향적봉 직전에 설경 클라이막스”
동엽령(1320m)은 원래 동업령(同業嶺)이었다. ‘여럿이 모여서 가야 하는 고개’라는 뜻이다. 남덕유산의 끝자락에 있는 육십령도 육십명의 인원이 되어야 고개를 넘었다 하니, 그만큼 깊고 험한 곳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산적 사고’가 많았고, 요즘엔 조난 사고가 많은 곳이다. 북쪽으로 상고대가 가득 맺힌 나무터널을 뚫고, 바람 세찬 능선길을 걷는다. 사람 키 높이의 관목지대를 통과할 때 강풍이 불자, 나뭇가지와 상고대가 얼굴을 후려칠 듯 마구 흔들린다. 급경사 계단을 올라 백암봉(1503m)에 서니, 이름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은 봉우리와 키 낮은 숲이 온통 은빛 세상이다. 눈이 시려서 뜰 수 없을 정도다.
백암봉에서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언덕을 20분쯤 올라 ‘덕유산 전망대’ 중봉(1,594m)에 섰다. 이곳에서 유려하게 뻗어내린 산 등어리를 조망하면 산 이름이 덕유산이라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 산으로 피난 온 백성들이 안개에 가려 적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해서 ‘덕(德)이 넉넉한(裕) 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기에 더하여 산의 생김새와 능선이 부드럽고 후덕하게 보여 덕유산이라 했을 것이다.
중봉에서 내려다보는, 우리나라 산에서 시야가 가장 넓게 열린 이 고원지대를 덕유평전이라고 부른다. 이 ‘평편한 야생의 꽃밭’에 봄이면 붉은 진달래와 철쭉, 여름이면 노란 원추리와 주황색 동자꽃, 겨울이면 하얀 눈꽃과 상고대가 화려하게 피어난다. 오늘 짙은 안개와 눈보라에 묻혀 시야는 닫혔지만, 내 기억 속의 ‘탁 트인’ 덕유평전을 소환하며 설원을 즐긴다.
향적봉에 다가서는 숲속 길에 덕유산 최고의 눈꽃과 상고대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천년을 버티며 기품있게 서 있는 주목과 구상나무에 함박눈이 얹힌 순백의 풍경! 나뭇가지마다 엉겨붙은 하얀 상고대가 마치 산호처럼, 사슴의 뿔처럼, 왕관처럼 흔들리는 동화 속 풍경! 허공에 검을 휘두르듯 서 있는 고사목에 수천 개의 단도처럼 박혀 반짝이는 상고대의 디테일! 그 사이사이를 안개꽃같이 흩어져 날리는 눈보라! 정상을 앞두고, 설경의 클라이막스에서 사람들은 전진하지 못한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의 눈썹과 머리카락에도 상고대가 피어난다.
향적봉에 오르기 직전에 향적봉대피소가 있다. 이곳의 단골손님은 사진작가들이다. ‘최고의 장면’을 찍기 위해 몇날 며칠을 보내며 ‘최고의 날씨’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가장 많이 접했던 사람은 바로 향적봉대피소를 20여년 운영했던 고 허의준 선생이다. 사진작가들이 다 떠난 5월 중순쯤 ‘갑자기 짱하고 나타난’ 상고대를 찍어 제1회 국립공원사진전의 대상을 받았다.
향적봉(1614m)에 오르니,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덜덜 떨며 긴 줄을 서 있다. 날씨가 좋으면 남쪽 방향의 산그리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또렷한 앞산부터 아련한 뒷산까지 첩첩한 산의 물결을 ‘산그리메’라고 하는데, 그런 산너울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향적봉이다. 멀리 팔공산, 가야산, 지리산, 마이산, 계룡산 등 대한민국 산의 절반이 뺑 둘러 산그리메의 끝을 이루고 있다.
향적봉(香積峰)이란 이름이 참 예쁘다. 이곳에 눈(누운)향나무가 많아 이름 지었지만, 예전에 다 캐어가거나 불에 탔고, 현재는 돌 바닥만 황량하다. 어느 한쪽에 눈향나무를 복원해서 이름에 걸맞는 ‘장소 이미지’를 회복하기 바란다.
◇ 향적봉~백련사~구천동 8.4㎞ “600년 돌배나무 일견, 계곡 따라 7시간 산행 마쳐”
이제 하산이다. 어서 가야 하는데, 내리막 초입에도 풍채 좋은 거목에 하얀 상고대가 가득 붙어 걸음이 늦어진다. 계단에 눈이 쌓여 다져진 45도 ‘미끄럼 길’이 계속된다. 미끄럼 반, 뜀박질 반으로 슝슝 내려가는 청년도 있고, 아이젠과 스틱으로 균형을 잡으며 조심조심 내려서는 중년도 있다. 세대 차이, 무릎 차이다. 수백 개의 겨우살이가 까치집처럼 하늘 높이 떠있는 참나무 숲길을 지나 백련사에 이른다. 절 풍경은 소박하다. 우화루 앞에 간신히 서 있는, 600년 된 아름드리 돌배나무의 깊은 주름과 굴곡을 보며 차분한 마음을 가져본다.
한때는 덕유산보다 더 유명했던 구천동(九千洞) 계곡을 내려간다. 계곡 굽이굽이 얼마나 풍광이 많은지, 다른 유명한 계곡은 8경이나 9곡을 선정했지만, 이곳은 33경을 선정했다. 그러나 겨울엔 다 얼어서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박문수 어사길’이라는, 계곡에 붙여 새로 조성한 탐방로를 타고, 구천동 상가에 들어서면서 산행을 마친다. 향적봉에서 출발한지 2시간 30분, 칠연계곡에서 출발한 지 7시간쯤 되었다.
예전에 전쟁을 피해 숨어든 백성들을 보살펴 주었던 산, 지금도 최고의 설경과 산그리메와 계곡 절경을 보여주며 덕을 베풀고 있는 덕유산이다. 그러나, 산 한쪽이 허물려 리조트에 내주고, 산 정상에 곤도라와 인파가 몰리고, 향나무 없는 향적봉이 된 덕유산이다. 이제는 사람이 덕을 베풀어야 할 차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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